아이가 이렇게 말하면 그냥 안아주세요
"엄마, 배가 딘딘딘해요.."
큰 딸이 이제 막 말문이 열린 어느 날 차 안에서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딘딘딘? 무슨 말이야? 배가 아파?"
"아니요, 딘딘딘해요..."
"배가 고파?"
"아니... 딘딘딘 하다고~~~"
"뭐지? 배가 콕콕 찔러?"
도무지 무슨 말인지 파악이 안 되는 모녀의 대화를 들으면서 운전을 하던 남편까지 합세해서 물었지만,
"아니, 딘딘디이인~~~"
아이는 왜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야속한 눈으로 계속 같은 대답만 했다.
알아듣고 싶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지만 뭘 알아들어야 도와줄 텐데... 안타까운 마음에 그저 아이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엄마의 가슴에 안긴 아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그 후로도 "엄마, 머리가 딘딘딘해요.", "요기가 딘딘딘해요~"
한참을 '딘딘딘'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매번 이리 와하고 안아주기만 할 뿐
도무지 그 단어의 참 뜻이 무엇인지는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어떨 땐 너무 알고 싶어서 남편과 눈을 감고 딘딘딘을 계속 되뇌면서 어떤 느낌이 감지되는지 실험을 해 보기도 했다.
"뭔가 흔들리는 느낌?"
"아니, 좀 울렁거리는 느낌?"
"가려운 거 아냐?"
둘이 개그만 찍을 뿐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가 자라고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는 더 이상 '딘딘딘'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정말 그 단어의 뜻이 알고 싶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리라.. 해서,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난 후에 그 말이 생각났던 날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딘딘딘? 그게 뭐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너에게 그 느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너 어딘가 불편하면 항상 그렇게 말했어. 응?"
"몰라요~처음 듣는 말이야, 근데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아앙~ 너무 귀여워~!"
아이는 자신이 너무 귀여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엄청난 만족을 느꼈지만, 나는 이제 영원히 그 말의 뜻을 알 방도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대단히 실망하고 말았다.
아직도 알고 싶은 그 단어, '딘딘딘'은 영원히 베일에 싸인 단어로 남아버렸다.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이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가끔 궁금해진다
"아이는 왜 딘딘딘이라고 나에게 말했을까?"
"간절하게 엄마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아이에게 과연 나는 충분히 도움을 주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아이가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어딘가 불편한 곳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때 아이가 4살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어린아이에게는 몸에 일어나는 평상시와는 다른 자극들이나 불편함이 무척 놀랍고 낯설게 느껴졌을 것도 같다. 어른들은 이것이 아픈 것이다, 어지러운 것이다, 가려운 것이다 이미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지만 아이들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 불안함을 엄마에게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그럴 때마다 엄마가 품에 안아 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곧 평온을 되찾곤 했었다.
엄마인 나는 아이의 뜻 모를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어 했지만, 어쩌면 아이가 원한 것은 엄마가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차려주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원한 것은 가장 불안한 순간에 부모로부터 오는 공감, 그리고 따뜻한 품어줌이 아니었을까...
"우리 딸, 딘딘딘하구나~ 에고~ 이리 와!"하고 안아 줄 때 아이는 엄마의 품 안에서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 사랑의 힘으로 흔들리는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을 것 같다. 그럼, 그럴 때마다 그냥 꼬옥 껴안아준 것이 아이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딘딘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느낌과 의미조차 기억을 못 한다. 이제는 정확하게 또박또박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좋다, 싫다, 아프다, 귀찮다, 짜증 난다. 억울하다, 너무하다... 아이가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주면 당연히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아이가 자기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오히려 소소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모든 사춘기의 부모들은 공감을 하겠지만, 도저히 대화라는 것이 가능할까.. 왜 이렇게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하는 건지, 품 안에서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던 아이들이 한순간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감당하기 힘든 관계에 놓여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혼란 앞에 때로는 아이를 다그치기도 하고, 그 정도도 참아내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아이와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붙들고 수많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럴수록 담은 더욱 높이 쌓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분노와 실망만이 남았다.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 답답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춘기 때의 아이들이 정리되지 않는 감정의 혼란을 정리되지 않는 논리로 쏟아내었던 그 가시 돋친 말들이 또 다른 종류의 '딘딘딘'이 아니었을까...
분명히 자기 자신인데도 자기가 누구인지 혼란스럽고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한 아이들이 그렇게라도 "엄마, 나 좀 불안해요,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이해하고 보면 무한한 감정의 불안함을 호소한 아이에게 논리로 무장한 엄마의 전투태세가 참으로 당황스럽고 섭섭하기까지 했을 것 같다.
어쩌면 이제 중년이 다 되었다는 나도 남편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 번씩 '딘딘딘'이라고 말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는 불편함에 대해,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에 대해 어떨 땐, 화난 표정으로, 짜증으로, 말하지 않고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 감으로 열심히 사람들에게 "딘딘딘하다구!"라고 표현하고 있을지도... (아, 정말 부끄럽다)
그럴 때 만약 상대방이 논리로 무장한 채 나를 설득하려 한다면 나는 더 화가 날 것 같다. 내 마음도 몰라주는 야속한 사람이라 서운해질 것 같다. 왜냐면 그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와 믿고 기댈만한 든든한 어깨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겨우 말하기 시작한 아이나, 질풍노도의 사춘기 자녀들이나, 다 큰 어른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모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없이 안아주는 부드러운 사랑을 누구나 갈망한다. 그런 사랑과 친절을 경험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어느새 양심이 살아난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며 내뱉은 자신의 가시 돋친 말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도 스스로 뉘우치고 마음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갖게 된다.
사랑이 먼저인데 나는 왜 그렇게 딘딘딘하다고 외쳐대는 아이의 마음도 모르고 당장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는 것에 몰두했을까, 왜 좀 더 아이를 너그러이 안아주지 못했을까... 이제 와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두 딸은 성인이 되어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지만, 요즘도 한 번씩 알 수 없는 짜증을 낸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공부가 자기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될 때 냉 온탕을 오가는 딸들의 눈치가 보인다. 해주는 밥 먹고 다니면서 괜한 엄마는 왜 들들 볶냐 따지고 싶지만 그것도 이제 보니 '딘딘딘'한 거다.
글을 마치기 전에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들어온 두 딸을 안아줬다. 다 큰 녀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안긴다. 엄마에게 안기니 좋단다. 역시 '딘딘딘'에는 엄마의 품이 답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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