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너의 얼굴이 그렇게 밝았던 이유를
아홉 살 때, 놀이터에서 놀다가 무릎이 찢어져 응급실에 갔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순간 높이 떠있는 그네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 하고 착지하면 멋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겁도 없이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던 대로 아주 멋있는 포즈로 착지했습니다.
마음속에 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싸! 성공'
뿌듯한 마음에 아주 가볍게 일어났는데, 오른쪽 무릎이 이상했습니다. 확인해 보니 무릎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로 찢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엄마 품에 안겨 응급실로 끌려가서 바늘로 꿰맸습니다. 회복하는 데도 정말 오래 걸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아팠던 것만 생각하면 좋은 기억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때는 제게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응급실에서의 아픔,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의 불편함보다 그네에서 착지했던 순간의 희열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희열감이 아직도 제게는 너무 소중한 것 같습니다.
응급실에서 겪는 아픔은 사실 지금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네에서 뛰어내릴 때의 그 희열감은 모험심 가득하고, 세상물정 모르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9살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수함이라고는 다 빠져버린 대학 3학년 저로서는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느낌이기에 더 소중하게 남은 것 같습니다.
<작은 딸아이의 2023년 1학기 과제제출용 에세이 중에서>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작은 딸아이는 당시 함께 공동생활을 하던 이모들과 저녁 마실을 나갔다.
이제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해진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모들이 트랙을 따라 걷는 동안 아이는 그네를 타면서 놀았는데 그러는 중에 위와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손 쓸 틈이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놀라 흥분한 이모 중의 한 명이 아무래도 막바로 응급실을 가야 할 것 같다며 다급한 전화를 했고 이게 무슨 일인가 경황없이 대문을 박차고 나갔을 때, 저 멀리 가로등 아래 이모들의 부축을 받고 어기적 걸어오는 아이 모습이 보였다.
놀란 엄마의 새가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를 철철 흘리는 다리를 끌면서도 나를 보자마자 세상 환한 웃음으로 "엄마"하고 부르는 아이의 얼굴..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얼굴이 참으로 기가 막힐 뿐이었다.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이.. 철없는 것..'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그대로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제대로 상처를 확인했더니 생각보다 상처가 깊고 여러 바늘 꿰매야 할 상황이었다. 그제야 현타가 온 아이는 좀 전의 그 해맑은 웃음이란 온 데 간데 없이 응급실이 떠나가게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싫어! 안 할래~!"를 외치면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아이를 얼래고 달래서 겨우 처치를 끝내고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그날...
응급실에서 난리를 치면서 울던 아이의 모습보다 가로등 아래 맥락과 맞지 않는 환한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오던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날을 아이는 위의 에세이처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가 이 날을 기억한다면 단순히 무릎을 다쳐서 응급실 가서 꿰매느라 많이 무서웠던 날 정도로 기억할 줄 알았는데... 아이의 에세이를 보면서 그날의 생뚱맞았던 웃음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당시 이모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고가 나는 그 시점에 하늘 높은 곳 허공에 손에서 그네 줄을 놓은 채 붕 떠 있던 아이의 모습이 하나의 정지 화면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이제 보니 단순 사고가 아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결과에 까지 그 생각이 이르기엔 아직 어린 아홉 살 아이의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엄마와 이모들이 까무러치게 기겁하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필이면 외래 진료 마친 이후 응급실 이용으로 엄마 지갑이 새나가든 말든.. 아이에게는 대 만족이었다는 것... 아이의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의 의미는 만족감과 희열이었던 거다.
아이의 에세이를 통해 비로소 그날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예상외의 큰 사고를 친 것이라 그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못하고 몰래 마음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뿌듯함과 희열이 이제야 내 마음에 전달이 되는 것 같다.
훌쩍 자라 스물두 살이 된 딸아이에게도 이제는 동경으로 남은 그 작은 아이에게 "와우, 멋진데~"하며 박수라도 보내고 싶어 진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이런 무모한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제는 행동하기 이전에 결과를 미리 숙고해 볼 줄 알고, 대책 없는 이상보다 책임져야 할 현실의 무게를 실감하는 ‘현실적인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장하면서 이성적이 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 행동과 선택이 이전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어린 시절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다양한 교훈을 얻으며 여기까지 잘 성장해 온 아이가 언제나 든든하고 고맙다.
그렇지만 에세이의 마지막에 "순수함이라고는 다 빠져버린 대학 3학년 저로서는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느낌이기에 더 소중하게 남은 것 같습니다."라는 고백은 무척이나 낯설고 한편으론 쓸쓸하기도 하다.
아직 대학 3학년인데.. 순수함이 다 빠져나가다니...
지난해에 성년식을 했고,
시험 준비에 아르바이트에..
곧 휴학을 하고 그동안 몇 가지 자격증 준비와 공부 계획을 세우다 보니
높이 솟은 그네에서 멋지게 착지하는 공상을 하긴커녕, 그런 비현실적인 꿈을 꿀라치면 여지없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법칙을 이기기엔 나날이 비대해져 가는 자신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도 이제 스물두 살인데..
그때처럼 그렇게 무모할 리는 없을 테니 나는 우리 딸이 이따금 머리 위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보면 좋겠다.
그리고 그 광활한 빈 하늘만이 줄 수 있는 근사한 착지에 관한 꿈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갈 날들이 앞으로 더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가슴속에 이와 같은 하늘 하나 살아있다면 삶이 마냥 팍팍하고 고단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다.
세상물정 모르고, 겁날 것도 없어서 일단 질러 놓고 보던 그 무모한 아이의 어이없던 함박웃음을
지금 다시 찬찬히 머릿속에 떠 올려 보니 참 당당하고 생기 발랄하고 예쁘다.
그 모습에 내 입가에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 당당하고 생기 발랄한 웃음이 아이와 나의 마음에 오래 오래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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