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문어와 함께: 글(文) 속으로, 말(語) 속으로~
2024년 버킷 리스트
"여보, 오늘은 무슨 영화 볼까요?"
"글쎄, 자기 보고 싶은 거 봐."
"정말? 그럼 나 보고 싶은 거 봐도 돼요? 저번 주 모임에서 친구가 강추하더라고요. 자긴 울면서 봤다면서... 아직도 있나 모르겠네? 나온 지 한참 된 거라고 그러던데..." 난 넷플릭스를 뒤졌다.
"찾았다. 이게 아직도 있네." 난 신이 나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남편은 첫 부분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여보, 그런데... 이거 다큐멘터리인데?"
남편이 잘 안 보는 장르는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다.
"그렇긴 한데, 이거 친구가 극찬한 거라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재미없으면 바로 저번에 보던 그 킬러 영화로 돌리기로~ 오케이?"
묵묵부답~ 영 내키지 않는가 보군.
바로 포기해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조금만 더 보기로 했다.
집착과 소심의 완성체인 남편은 "이거 다큐멘터리인데..."를 2분 간격으로 입 안에서 굴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Go 했으니 조금 더 Go.
<나의 문어 선생님>은 오랜 해외 촬영에 몸과 마음이 지쳤던 크레이그 포스터(Craig Foster)가 찍은 다큐멘터리다. 케이프타운 근처 펄스만의 다시마숲에서 프리 다이빙을 하던 중 그는 온갖 조개와 소라껍데기로 뒤덮인 희한한 문어와 조우하게 된다. 처음 보는 이상한 광경에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이 문어에게 무엇인가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에 지쳤던 그였지만 순수한 호기심에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된다.
내가 놀란 건 1년을 매일같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크레이그 포스터다.
그는 앉으나 서나 문어생각이 났다고, 문어생각에 가슴이 뛰었다고, 카메라 앞에서 고백했다. 위기에 처했던 순간을 얘기할 땐 말이 빨라지고 얼굴이 빨개졌다. 헤어지는 부분을 이야기할 땐 목이 메고 눈가가 촉촉했다.
그렇다. 그는 문어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난 그를 보면서 내가 2024년에 해야 될 일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피곤함에 시작하지 못했던 일.
글쓰기와 사랑에 빠지기.
앉으나 서나 문어(文語) 생각하기.
365일 매일 글(文) 속으로 말(語) 속으로 풍덩 잠수하기.
문어가 크레이그 포스터와 매일 시간을 보내면서 둘은 교감을 나누고 서로 신뢰하게 되었다.
그의 손과 가슴에서 유유히 놀던 문어(文魚)처럼 나도 문어(文語)와 착 달라붙어 놀고 싶다.
문어는 천적인 파자마상어에게 당해 팔 하나가 뜯겨 한동안 앓기도 했지만 다시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나도 힘든 시기가 있겠지만 문어처럼 씩씩하게 이겨낼 것이다.
1여 년이 지나, 문어는 알을 낳고 돌봄에 기력이 약해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다.
슬픔을 삼킨 크레이그 포스터는 후에 아들을 데리고 문어의 자취를 쫓았다. 다이빙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 작은 새끼 문어 한 마리가 다가와 주변을 맴돌았다. 생긴 모습과 시기, 위치를 고려해 볼 때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문어에게서 나온 새끼 문어라고 감독은 확신했다.
계속되는 자연의 신비.
인고의 시간을 견디면 나에게도 결실을 맺는 글들이 나오리란 격려가 되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팔짱 끼고 소파 뒤로 깊숙이 기대어 화면을 보던 남편 몸은 어느덧 소파 앞쪽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아름다운 영상에 중간중간 감탄사를 내뱉고 파자마 상어가 문어를 공격했을 때는 "저런, 저런~"을 내뱉기까지 했다.
난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남편을 놀려주려는 생각에 물어봤다.
"아까 킬러가 나오던데... 파자마 상어~. 오늘 본 <나의 문어 선생님>에 만족해요?"
"파자마 상어? 에이~ 킬러로는 약하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까 다 봤다.
중간에 눈을 손바닥으로 쓰윽 훔치며 조용히 훌쩍대던 남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