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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퀸 Jan 22. 2024

난 엄마의 인형이 아니야!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어 미국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집 생각이 나냐고?

전혀. 이리 자유로운데~

미국 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 외로울 시간이 없냐고?

재미는 무슨 개뿔. 뭘 모르는 소리다. 외롭다.

그럼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냐고?

음, 나에게는 나름 방법이 있다.

그게 뭐냐고?

그건 바로 빵!

난 빵 중독자다.


난 베이커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베이커리는 나에게 팜므파탈이다.

(팜므파탈:남성을 유혹하여 사랑하게 만든 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미모를 가진 여자)

나에게 빵 굽는 냄새는 샤넬 No.5만 입고 잔다는 마릴린 먼로보다 더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날은 칼바람이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추운 날이었다. 동네 베이커리 유리창을 통해 스며 나오는 노란빛이 너무나 진하고 따뜻한 유혹이어서 난 주저하지 않고 유리문을 열고 천국으로 입성했다.

   

"Good afternoon~!"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직원은 버터를 넣어 구운 크루아상처럼 부드러운 눈인사를 건넸다.

"Good afternoon~!"

자연스럽게 나도 인사를 건넸고 친절한 직원을 따라 내 영어발음도 버터같이 부드러워졌다.

'음~ 오늘은 뭘 먹어볼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나는 여기저기 포진한 이름도 생소한 빵들을 둘러보느라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유리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훅 밀려왔다. 진분홍 원피스 위로 아이보리색 인조모피 코트를 입은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이 여인의 미니어처가 따랐다. 대여섯 살 정도 된 것 같은 여자아이는 이 여인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 둘에게 꽂혔다. 이 추운 겨울에도 한껏 멋을 낸 걸 보니 음악회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이 우아한 여자는 아이에게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미국 땅에서 듣는 한국말에 귀가 활짝 열렸다.


"아, 빵 종류가 참 많기도 하네. 에밀리,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원하는 거 사줄게~" 높은 톤의 목소리가 베이커리 안 공기를 한 옥타브 정도 올려놓았다.

쭈뼛쭈뼛 대던 에밀리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초콜릿으로 뒤덮인 크러핀을 손가락으로 수줍게 가리켰다.

"음, 이거요~"

 

크러핀

"어머, 맛있어 보이네. 맛있겠다~. 하지만 이거 초콜릿이 너무 많은데? 이건 안 되겠다. 에밀리, 딴 거 골라봐."


여자 아이는 아쉬운 듯이 크러핀을 한번 더 쳐다보고 발을 질질 끌며 옆으로 옮겨갔다. 옆 도넛 코너로 가 이것저것 구경하던 아이는 결심이 섰는지 어느새 저만치에서 딴 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여자를 불렀다.

 

"엄마? 그럼... 저... 이거 먹어도 돼요?"       

보스턴 크림 도넛


몸을 기울여 치즈케이크에 코를 바짝 대고 있던 키 큰 여자는 몸을 살짝 떨며 아이 쪽으로 춤추듯이 다가갔다.

"그래, 골랐니? 어머, 이거 도너츠잖아. 너 발레 선생님이 살찌는 거 먹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이런 거 고를래?"

이 말에 아이의 입은 뾰로통해졌다. 고개를 숙여 자기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어린 소녀는 공연히 헛발길질만 하고 있었다.


"에밀리~ 넌 왜 빵 하나 제대로 못 고르니? 에이, 안 되겠다. 내가 알아서 살게."

자신을 엄마라고 주장하는 이 여자는 발레리나처럼 날듯이 카운터로 갔다. 마치 무대에 선 연극배우 같은 그녀는 손에 부채만 들면 영락없이 공작부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으리라.

 

"Here, please slice one baguette for me. I don't want to gain weight, so I should buy a healthy bread like a baguette, right?" (여기 바게트 한 개 썰어 주세요. 살찌면 안 되니까 건강한 빵 바게트를 사야죠.)

"Sure, I will slice the baguette for you. Would you like me to ring it up?" (네, 그럼 바게트 빵 썰어드리겠습니다. 계산해 드릴까요?)

"Oh, um... well... Can you also give me one slice of cheesecake over there? It goes perfectly with coffee. Hehe~" (아~ 저기, 그게.. 어... 저기에 있는 치즈케이크 조각도 하나만 주세요. 커피 마실 때 딱이거든요. 호호~)

"Alright, would you like me to give you one baguette and one slice of cheesecake?" (네~ 그럼 바게트 빵과 치즈케이크 한 조각 드릴까요?)

"Um... no... no. Since I'm already here, I'll go ahead and get one more slice. Please give me two slices of cheesecake." (어... 아니... 아니요. 이왕 온 김에 한 조각 더 사도록 할게요. 두 조각 주세요)

치즈케이크를 이야기하는 여자의 톤은 더 빠르고 높아져 바이올린 현을 서투르게 연주하는 것 같은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이 어이없는 여자 옆엔 아이가 서 있지 않았다.


깡마르고 조그마한 여자 아이는 자신이 먹고 싶었던 초콜릿 빵 코너에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불쌍한 아이 앞에선 초콜릿이 가득 올라간 빵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난 이 어린 천사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당장 사주고 싶었지만 몸무게 운운하는 살쾡이 같이 앙칼진 여자가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유심히 보다가 난 갑자기 울컥해져 버렸다. 내 눈엔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만큼 차 올랐다.


그 순간 난 내 속의 아이와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내 의견을 물어보긴 했지만 정해진 답이 아니면 절대 들어주지 않고 항상 고집스럽게 당신들의 뜻을 관철시키셨던 부모님. 반항다운 반항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던 순둥이.

이 눌리고 눌렸던 욕망들이 한꺼번에 화산처럼 터져 나올 즈음 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난 감히 아이에게 다가갈 순 없었지만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에밀리, 엄마에게 물어봐! 원하는 것을 사주지도 않을 거면서 애초에 왜 물어봤냐고.'

'에밀리, 엄마에게 요구해! 원하는 것을 사주기로 약속했으니 네가 고른 것을 사달라고.'

'에밀리, 엄마에게 경고해. 다시는! 너에게 엄마의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고!'


'넌 엄마의 인형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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