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인 용산구 시민이 되면서 난 당근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당근 속 모임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웃들도 사귈 겸 영어모임을 열었다. 토요일 4시에.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제 좀 자리가 잡혀가나 싶었는데...
겹친다. 시간이.
남편은 건조하게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날은 그냥 모임 갖지 말라고.
Skip 하란다.
난 J! 그것도 심한 J다. 98%의 J인데 MBTI 검사 결과지를 보고 왜 내가 100% 가 아닌지 서운해할 정도의 중증 J다.
난 신혼여행을 결혼 직후에 바로 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가르치고 있는 수업을 1주일이나 뺀다는 것은 나 같은 J에겐 중대한 범죄다. 그래서 수업 다 마무리하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갔다. 5월의 신부였지만 신혼여행은 한여름에. 그것도 그 더운 태국에. 지글지글 햇볕에 타 죽을 뻔했다.
난 티칭에 관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too much 책임감' 소유자다.
이런 바보 같은 잘난 척을 하는 순간 뱃속 불편한 옛 기억이 스멀스멀 목구멍으로 기어 올라왔다.
일생의 한 번 밖에 없는 신혼여행을 제 때 못 가다니.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였고 시간 조정을 요청했으면 당연히 받아들여졌을 텐데...
융통성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또 그러고 있다.
티칭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중요한 결혼식에 안 갈 생각을 하고 있다.
남편에게는 어설픈 한 마디를 던져놓은 상태다. 모임의 7명 모두가 만장일치로 토요일 12시에 시간을 맞출 수 있으면 결혼식에 가겠다고.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12시로 시간을 옮긴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른 쓴 기억과 함께 그 잘난 J의 부질없는 책임감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들리는 남편의 또 다른 솔루션.
"그러면 그날은 excuse 하고 그다음 주부터 토요일 두 번에 걸쳐서 30분씩 더 늘려서 수업하면 되잖아."
'오~ 그러네.'
'난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지?'
아득한 옛 공포 영화 속 아이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하는 것 같다.
"뭣이 더 중한디~ "
내 속의 두려움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제 막 형성되어 가는 모임이 나의 무책임으로 깨어질까 봐. 즉,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메시아 콤플렉스에 찌든 자아. 그리고 또 하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써서 쌓아 올린 철옹성이 허물어지고 나의 본모습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는 연약한 자아.
자~ 이제 내가 변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인지 시험해 볼 시간이다.
스케줄을 변경하는 나의 행동이 융통성으로 불릴 것인지 아니면 무책임으로 정의될 것인지.
그리고 내가 만들어 놓은 네모난 틀이 나와 타인에게 안전한 집인지 아니면 감옥을 만들어 놓은 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을 깬다.
그리고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모임이 깨지면 타격이 있겠지만 다시 만들면 된다. 내 걱정의 무게가 모두에게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일로 판명 난다면 난 조금 더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