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관계의 해빙
제주에 내려온 지 6개월을 앞두고 이제 슬슬 분위기를 바꿔 볼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삶은 노마드 아닌가. 어디서든 삶은 이어지고 정든 곳을 떠나면 머리 한 구석이 비워지고 또 다른 삶이 다가온다. 환기가 필요할 때였는가 보다, 절실히. 다채로운 제주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은 진리인가 보다. 익숙한 문을 뒤로하고 새로운 문으로 들어서서 다른 공기를 깊이 갈마들인다. 호(呼)와 흡(吸)을 천천히 하며 폐에서 온몸으로 새 공기를 들이마신다.
'누가 이렇게 예쁜 꽃을 마침하게 잘 심어놨대?' 하며 고향집에 온 듯 환한 꽃들이 반기는 뜨락에 선다.
저녁노을을 맞이하기 딱 좋은 위치에 침대방이 있으니 그 또한 축복이다.
그런 집을 발견하고 바로 옮길 결정을 했다.
짐을 얼추 싸놓고는 냉장고를 비웠다.
집에서도 그렇지만 청소 중에 제일 하기 싫은 게 나는 냉장고 청소다.
뭔 자실자실한 게 그리도 비우지 못하고 잔뜩 있는지, 이번에 옮기면서 따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고사리도 내가 먹을 거 조금만 남겨두고 여기저기 나눠주었다. 내 개인 방에 소형보다 조금 큰 냉장고 하나, 공유 부엌에 냉동고 큰 거 하나와 소형 냉장고 1, 이사 갈 집에 하나, 총 4개를 왔다 갔다 하며 하루 종일 치웠다. 허리가 휘청, 어깨가 뻐근했다. 냉장고가 많아 방만하게 쓴 게 잘못이다.
공유하던 냉동실과 소형 냉장고는 얼음이 쉬이 녹질 않았다. 가로세로 스크럼을 짜듯 결이 아주 빡빡한 게 '내가 녹을까 보냐? 흥' 하는 얼굴로 아주 싸했다. 그래, 누가 이기나 어디 해 보자 하는 셈으로 나도 지지 않고 포트에 뜨거운 물을 끓여 부어가며 녹이는데도 제멋대로 엉겨 붙은 얼음은 빙하처럼 단단했다. 가끔씩 살면서 정기적으로 비우고 또 정리하며 살아야 하는데 자칫 시기를 놓치고 말면 떡진 머리처럼 볼썽사납게 변하고 마는 게 냉동실과 냉장고다. 안심은 금물이다.
전에 공동체 생활하다 한 번씩 부모님 집에 가면 인사하고 무조건 냉장고 청소부터 하곤 했다. 나이 지긋해지면서 엄마는 냉장고 청소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단 커다란 다라이를 가져와 다 꺼내 비우고 닦고 또 닦던 기억이 새롭다. 엄마 생각 물큰 올라왔다.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다 칼등으로 얼음을 탕탕 내려치다 보니 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사우나 한 번 시원하게 제대로 한 셈이다. 탁탁 쳐 내려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눈치챌 수 없이 차츰차츰이겠지, 굳어지는 줄도 모를 정도로. 그러다 어느 틈에 조금씩 얼어붙은 관계는 이다지 풀어지지 않고 두꺼운 얼음장이 되어 쌓이겠구나.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매일 매 순간 돌아보고 느끼고 깨달으려는 마음 일깨우고 살려했는데... 살짝만 무심함이 길어지면 얼어붙는 건 눈 깜짝할 새다. 녹이는 건 그야말로 중노동이고 시간도 만만찮게 걸리는 일이다. 지치는 몸 뒤에 중증 감정노동까지 따라붙는다. 청소 없이 지나가면 냉동실은 그대로 빙하시대 연장 아니겠는가? 관계도 마찬가지.
냉동된 관계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래, 자주자주 녹이고 털어내고 환기하는 게 필요했구나.
너영 나영 어우러짐에 씨실 날실 짜임이 있다면 얼어붙는 타이밍을 빨리 발견하고 응급조치하는 행동에도 골든타임이 있었던 게야. 하지만 내 힘으로 깨버리고 녹일 수 없는 관계도 있게 마련이다. 이럴 땐 굳이 녹이려 헛힘 쓰지 않기로 한다. 버려야 할 냉동실도 있는 법이니까.
머리를 쿵 때리는 한 깨달음이 오늘의 밥이다.
비우고 녹이고 깨부수고 닦고 또 닦아냈다.
락스물 풀어 개운해진 건 비단 냉장고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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