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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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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거야, 원

by 조유상

손이 커서 탈이야.

지난주 목, 금 비가 하루 반나절 내렸다. 비가 오면 습관처럼 나서고 싶은 나. 마지막 고사리를 만날 수도 있어, 하며 장화랑 고사리 장비를 갖추고 나섰다. 역시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예상대로 실비가 가끔 오고 있어 사람은 드물었다. 노래도 부르고 감사의 절도 해가며 마지막 고사리를 땄다. 늘 따던 곳에서 충분히 딴 고사리로 우리 숙소 식구들과 나눠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이번에 딴 고사리는 삶아 바로 물에 우렸다. 농협마트에서 소고기 1킬로와 숙주 두 봉지, 대파와 무 반쪽을 사서 들어왔다. 양지는 미리 찬물부터 시작해 오래 거품을 걷어내며 끓였고 파, 마늘, 무를 잘라 멸치가루와 어간장, 국간장에 간이 배게 다독여 놓았다. 양지가 질감이 있으면서 쪽쪽 결대로 찢어질 때쯤 꺼내 국간장과 고춧가루 생강가루 마늘 후추에 간이 배게 하고 쌀뜨물 받아놓은 것도 더 보태 들통 가득 끓여 놓았다. 고사리를 엄청 많이 넣은 진국 고사리육개장.


이층 내 앞방 갑장에게도 먹으라 밥도 넉넉히 해 두었고 조천 친구랑 아래 숙소 동생도 불렀다. 다른 손님들은 들어오질 않아서 한 냄비 떠서 내려보냈다. 배불리 한 대접씩 먹고도 넉넉히 남아 일부 얼려놓고 일부 덜어 위미리 바닷가에 제주 감귤 농사짓는 친구에게 갖다 주었다. 건네주고 잠시 이야기하고 돌아서 바닷가를 걸었다. 언제든 위미리 바닷가는 한결같이 뾰족한 바위가 많은데도 익숙해 살그머니 풍경에 안긴다.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재미난 제주말도 따라온다. 전에 남편과 같이 걸으며 깔깔대며 웃었던 글도 여전하다. 40여분 죽 걸어 올라가서 파도를 보며 떠오른 시어를 메모하고 되짚어 내려오는 길.

오토바이와 씨름하는 아저씨가 보인다. 분명 넘어진 거다. 얼른 다가가 아저씨 괜찮으세요? 도와 드릴까요? 묻는데 술내가 확 끼친다. 아이코... 순간 이걸 일으켜드리는 게 맞나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외길 한 복판이니 일단은 빼야 한다. 차 한 대가 와서 유인해 피해가게 해 놓고 아저씨와 영차를 외친다. 스쿠터보다는 좀 더 큰 오토바이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두어 번 용을 쓰고 같이 일으켜 세웠는데 벽 쪽으로 세워놓자고 하니 아저씨가 오토바이에 슬그머니 다리를 걸치네. 아저씨, 안 돼요. 다급해진 나는 소리쳤지만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시동을 건다. 아저씨 팔을 잡으며 말린다. 제발요... 아저씨 지금 타시면 큰일 나요. 위험해요.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돈데 타이어도 요철 하나 없이 다 닳았다. 넘어지며 백미러도 살짝 돌아갔고 뭔가 부서진 플라스틱 조각도 보인다. 아저씨 팔을 잡으며 말리는데 다행히 시동이 아저씨 발목을 잡는다. 계속 헛발질이다. 시동은 아저씨를 거부하고 있다.

아까 근처 걸어 들어가며 술 드시는 분들 목소리가 담을 넘어 흘러나오던 집으로 달려갔다. 떠드는 소리가 여전하다. 조심스레 계단 위를 밟았다. 모기장으로 둘러싸인 마당 한편에 네 분이 술상 앞에 앉아 있다. 혹시 여기서 한 분 약주 드시고 먼저 오토바이 타고 집에 가신 분 계신가요? 지금 밖에서 오토바이 타고 가시려는데 너무 위험해서요, 좀 도와주세요! 빨리요! 아저씨 두 분이- 이분들도 이미 술이 어느 정도 올라 있었다- 따라 나오며 흐린 눈으로 골목 끄트머릴 찌그려 본다. 00 형님 아닌가? 다행히 아직도 시동은 걸리지 않았고 여전히 오토바이도 아저씨랑 같이 술 마셨는지 양옆으로 흔들거린다. 다가간 두 분 중 한 분이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트리더니 거세게 욕을 한방 날려주며 내려, 형님 내려! 하고 외친다. 옷을 잡아 끌어내리니 마지못해 순순히 내려온다. (오, 약발 받는데!) 다른 한 아저씨한테는 오토바이를 끌어다 두라고 손짓을 한다. 나한테 몸을 돌리더니 집이 바로 요 앞이란다. 나도 좀 전에 바로 그 골목에 식당이 있어 궁금해 보고 오던 길이라 막다른 골목에 집이 서너 채 있다는 걸 눈치는 챘다. 휴, 다행이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니 형님한테 야단치던 분이 나한테 누군지를 묻는다, 고맙다며. 아, 저는 그냥 저 아랫마을 친구네 왔다가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절을 서로 몇 번이나 하고 돌아섰고 사태는 진압되었다. 돌아서 바닷가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다리가 얼마나 후덜거리는지 발이 휘뚱거렸다.


아까 잠시 고민했던 게 떠오른다. 저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워드린 게 잘한 걸까, 잘못한 걸까. 만약 그게 시동이 바로 걸렸다면 윙 달려 나가 심하게 넘어졌을 수도 있는데...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걷는 내내 숨을 길게 내 쉬었다.


숙소에 다 저녁에 도착하니 두 부부가 서 있다가 반가이 맞이한다. 얘길 하다 조금 전 후달린 얘기를 했더니 반응이 제각각이다. 한 여자분은 자기라면 바로 119 신고했을 거란다. 그 남편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자기 같으면 일으켜 세우면서 바로 열쇠를 뺐을 거란다. 아,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다른 동생은 난 왜 저래? 하고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지나쳤을 거라고. 그 남편도 나도 으이구 술 처먹고 쓰러졌구나, 하고 지나쳤을 거란다. 아, 상황은 하난데 반응이 다 다를 수 있구나... 그렇지. 갑자기 마음 오금이 펴지며 그때까지도 후덜덜한 마음을 턱 내려놓고 웃는다.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에 속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언젠가 남편이 나한테 그랬다. 자기는 지나가던 개한테도 말 거는 사람이라고.

어? 그거 뭐야? 욕이야? 욕이지?

남편 왈, 아니, 그냥 그렇다구.


약간 켕기며 욕하는 분위기 스멀스멀 느껴지는, 이것은 무슨 느낌?


모르겠다만,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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