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꿈이었나, 다시 제주로.
꿈인 듯 다녀왔다.
넉 달 만에 가족이 있는 집에. 지난달 남편이 여기 제주에 며칠 다녀가긴 했지만 제2의 고향인 홍성집에 가는 기분 설렜고 제3의 고향이 될지 어떨지 모를 제주로 오니 안심이 된다. 홍성은 우리 집, 여기는 나의 집, 엄밀히 말하자면 방이지만. 나 집 있는 사람이야! 그런 기분?
집, 집이 뭔가. 안에 담기고 쉴 수 있고 가족 한 사람마다 각자의 욕구를 채우고 꿈꿔갈 가장 기본적인 필요 공간이기도 하지만, 일이 무한히 보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번이 그랬다. 모처럼 도착한 집에서 나는 치우기부터 시작했다. 나의 빈자리는 지저분함으로 표가 났다. 내가 온다는 당일 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하고 화분에 물을 준 흔적이 흘러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들어가는 현관문 안팎도 쓸어놓았고 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하우스 앞, 안뜰에 세 그루 있는 삼색버들도 아주 시원하게 미리미리 이발을 해 놓았는지 하늘 향해 동그랗게 삿대질하며 서 있다. 내가 집에 가면 둘러보며 눈으로 잔소리할 걸 미리 예방해 놓은 그 마음에 닿아 고마웠다. 상대가 좋아하는 걸 알고 상대가 싫어하는 걸 안다는 건 함께 살아온 날들 경험치의 축적 아니겠는가?
엄마가 그랬다, 우리 유상인 무팥시루떡 좋아하지, 우리 유상인 음식 대체로 골고루 잘 먹고 노인네처럼 무릇한 것도 잘 먹어... 등등 엄마가 알아서 챙겨주던 것들, 그리운 시간 너머로 가버린 것들.
홍성 집에 와서 낯설어 한참 바라봤다.
두리번거리며 익숙했던 공간을 다르게 바라본다.
다르게 보니 다르다.
집은 집이고 머물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는 게 집이었다.
홍성 집에 가서 내가 온 것만으로도 이미 입이 귀에 걸린 막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괜히 와서 싱거운 짓하고 노래 앞부분을 부르면 내가 바로 뒤에 불러주는 걸 아니까 앞을 부르고 눈짓으로 토스하기도 전 나는 척척 받아 뒤를 불러준다. 이런 농담과 장난은 막내가 아빠랑은 하지 않는다. 왜? 받아주지 않으니까.
내 앞에서 무장해제되는 건 아들만은 아니다. 결혼 초, 세상 점잖아 보이는 남편도 내 앞에선 상상초월 춤을 추었다. 얼마나 웃기는지 혼자 보기 아깝고 나는 깔깔거리며 손뼉 치다 함께 추곤 했다. 그러다 남편한테, ‘자기는 남들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크렘린이라 그러던데, 나한테는 말도 잘하고 춤도 잘 추네’ 했더니, ‘내가 아무 앞에서나 그러나, 자기 앞에서나 자유롭지’ 했다. 식구는 남들 앞에서 안 하던 짓도 하는 자유로운 해방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다 해방을 방해하는 구속으로 향하기도 하지만.
치질 수술을 해 바로 앉는 것도 운전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아 트랙터로 고구마 심을 자리도 못 갈아 놓은 남편. 굵은 주름보다 불편한 그의 똥꼬가 더 안쓰럽다. 틈나면 꽃밭에 앉아 풀 매고 하우스에 심어둔 고추의 방아다리와 토마토 곁순을 따주는 사이사이 반찬을 만들었다.
제주서도 밥을 초간단으로 보통 해 먹고 지내다 집에 가니 어설펐다. 부엌에서 머릿속이 버퍼링걸려 뭐가 어딨는지도 잘 못 찾고 막내랑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들깨가루 어딨지? 들기름은?
천천히 버퍼링이 풀리고 실타래가 풀린다.
짜게 절여 항아리에 담아 두었던 무시래기를 남편한테 갖다 달래서 씻고 빨고 간기를 적당히 빼 국간장과 어간장, 파 마늘과 들기름 넉넉히 넣어 재워두었다 나물을 듬뿍해 놓았다.
고사리 고장에서 갔으니 삶아 얼렸던 걸 물에 담가 일부는 고사리나물로, 일부는 숙주나물 사다가 집에 말려두었던 토란대 불려 데치고 고사리육개장을 한솥 만들어 반은 식구들과 같이 먹고 반은 두 통에 나누어 얼려두었다. 뜰 안 여기저기 길쭉길쭉 팔뚝 길이로 자란 머위를 잘라 껍질 벗기고 데쳐 마늘 넉넉히 넣고 볶다가 불린 쌀 갈아 말린 새우 넣고 폭폭 끓여 머위탕도 만들어두었다. 그냥 머윗대 볶음은 잘 안 먹는 막내도 이 머위탕만은 잘 먹는다. 조갯살(충청도에선 소합, 할머니들은 스합이라 부르는)을 넣고 볶아도 맛나다.
심은 게 없으니 농협서 열무를 두 단 사고 여기 사장님이 해 준 방식대로 보리쌀을 사서 푹 삶아 살짝만 갈아 알갱이 거의 살아 있게 해 무도 썰어 넣고 김치를 한 통 해 두었다. 김치를 한 통 해 두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다. 나 없는 시간을 버텨주는 식구들에게 내 빈자리 대신 조금이나마 식구들 입과 영혼을 채워줄 내 방식의 사랑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기분은 좋았지만 풀 매는 일까지 안 하던 일을 한꺼번에 후다닥 해치우느라 등감이 저렸다. 맨소래담을 바르고 누웠더니 남편이 와서 주물러주며 말한다. 뭘 그렇게 많이 하느라 그래? 해 놓으면 좋지만 아프다 하면 나도 힘들지, 방법만 알려주면 되는데... (와우, 이 포인트. 이게 바로 바뀐 지점이다.) 자발성이 싹트는 지점에서 애정도 함께 돋는다.
아침형이고 빵보단 밥을 더좋아하는 그가 하는 아침밥은 우리 식구 중 제일 맛있다. 유튜브 하고 결혼했나 봐 할 정도로 나하고 보다 유튜브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그한테 이젠 음식 만드는 것 좀 보고 따라 해 보시지 했을 때, ‘거기까지는 내 영역이 아니야’ 하던 그. 떨어져 있는 시간 비례 음식 독립이 차츰 가능해지고 있다.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 이른바, 생존형 음식 만들기! 많은 유능한 셰프가 남자 아닌가. 남편이 셰프까지는 아니어도 못 하란 법은 없다. 능력은 하면서 개발되는 거니까. 해 보지 않으면 가능성 여부도 알아낼 수 없다.
내가 반찬을 만들 때 ‘내가 뭐 할까?’라고 묻는다거나 요즘 한창 나오는 마늘종 뽑아 놓은 걸 가져다 씻어 다듬어 놓는다거나 그런 모습이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전에도 내가 마늘을 까고 있으면 와서 같이 마늘을 까곤 했지만 이젠 요리 과정을 아니까 앞과 뒤에 할 것들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여한다. 물론 내가 있는 5박 6일 동안은 거의 내가 다 했지만. 이런 소소한 변화가 그가 살림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엄마 말이 맞았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돼!’
제주 나만의 집으로 내려오는 날, 벼락 맞을 확률로 청양에 수영 다니다 만난 친한 동생이 전화를 했는데 저도 마침 제주를 간단다. 같은 날이니 표 바꿀 수 있으면 자기 차로 함께 청주공항으로 가자고 해 광주행이 청주공항으로 바뀌었다. 막내가 나를 청양까지 태워다 주고 둘이만 청양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들은 간짜장 곱빼기, 나는 해물짬뽕. 맛있게 먹고 약속 장소로 갔는데 시간이 넉넉히 남아 둘이만 근처 카페에 가기로 했다. 길을 건너며 바짝 붙어 걷다 보니 부딪치는 손을 자연스레 잡았다. 아들도 아무렇지 않게 마주 잡고 신나게 흔들어준다. 통통하고 보들한 손을 잡고 걷는 기분이 든든하고 뿌듯했다. 음료를 시키고 앉아 자기 손도 보여준다. 일도 별로 안 하는데 굳은살이 박였다며. 그러게... 일을 왜 안 하겠어. 이제 일 철인데. 울 아들 애쓰네 하며 다정하게 바라본다. 각자의 얘기도 하고 슬그머니 아빠와 지내는 이야기도 나온다.
엄마도 아빠 잘 알지.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거, 그게 또 습관이란 이름으로 굳어져 노력은 해도 잘 변하지 않잖아.(그 덕에 남편은 막내한테 톡톡히 시집살이, 아니 아들살이 당하고 있다. 엄마가 왜 제주에 혼자 간 줄 알겠다며... 말 테러를 당하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 남편도 딱하고 매사 건건이 지적질하는 아들도 보기 괴롭다. ‘아들, 너 내 무촌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라~!’ 남편이 있는 식탁에선 대놓고 남의 편을 든다. 막내와 둘이만 있을 때는, 니가 많이 힘들지? 막내가 하소연한다. 그래, 그래... 한참 공감한다. 힘들어도 아빠한테 말할 때 아빠, 이렇게 하면 어때? 하고 하면 어떨까? 애도 아니고, 애라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잔소리 들으면 아빠도 힘들잖아, 지금 몸도 아프고 불편하잖아... 하고 살그머니 부탁한다. 네가 좀 봐줘, 잘 안 바뀌더라도. 물론 부정적인 답이 나오긴 한다. 그 마음, 여러 차례 공감 또 공감한다. 많이 공감하고 한 번 부드럽게 부탁한다.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건 아들의 몫이고 우린 더 기다릴 수밖에 없다. 큰아들도 틱틱거릴 때가 있었고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바뀌어 가지 않았던가. 부모는 그저 기다리는 게 일인 거 같다. 나도 엄마가 기다려주었으니 조금씩 달라졌던 거 아니까.
'엄마+아내'라는 완충 지대가 없으니 일상이 티격태격이다.
오늘도 그렇게 부자간의 아침은 참새의 하루처럼 아웅다웅 시작되리라.
나는 에라 모르겠다, 이젠 둘이 알아서 해결하쇼!
https://youtu.be/0fqtesY3guw?si=_2bBNZqFNQAMcRF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