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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기록

일상기록

15. 몽골 여행. 야크를 바라보다 문득

by 조유상






홉스골 캠프에서 이틀째 되는 새벽,

푹 자고 싶었는데 일찍 눈이 떠졌다. 하긴 여행 중 자는 시간과 상관없이 거의 일찍 눈이 떠지긴 했었다.

게르의 커튼을 열자 홉스골 푸른 하늘과 에머럴드빛 물빛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물안개와 야크떼까지.



사막이 아닌데도 홉스골 새벽은 7월 말에도 추워서 한밤중이면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고 밤중에 깨면 라디에이터를 틀고 자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말해 뭐 해, 환상적이지. 영혼이 밤새 홉스골 물 어귀에 깃들였다가 살그머니 하늘로 돌아가는 모습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물안개를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서늘하고 벅차올랐다. 매일 순간을 사는 나는 풍경 하나, 구름 미술관, 노을 하나만 보아도 하루가 뻐근하게 느껴지곤 한다. 아, 오늘 하루도 이걸로 충분하다. '죽어도 좋아'가 절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출퇴근하듯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는 야크 무리가 아주 바싹 게르 데크까지 다가와 둑둑둑 하는 소릴 내며 풀을 한 입씩 뜯어먹고 있었다. 덩치는 소와 망아지 사이쯤 되는 크기지만 부피와 몸집이 제법 체급을 느끼게 한다. 녀석들의 눈은 염소보다는 어룽어룽 소에 가깝고 털갈이를 마친 녀석들은 제법 깔끔하지만 주룩주룩 아직 떨어져 나가지 못한 털을 너질너질 달고 다니기도 한다.



전날 친구들과 그런 말을 했었다. 야, 여기 이렇게 넓은 풀밭을 관리하기 참 어려울 텐데 참 잘 관리하고 있다고. 나도 친구들도 예초기질 하는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만, 아니었다. 야크의 입이 예초기였던 셈이다. 푹,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르고 또 그렇게 생각만으로 단정 지었구먼. 그래, 모를 땐 물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안다고 생각해 섣부르게 아는 체하고 단정 지었음을 발견한다.



새로운 발견과 더불어 시작한 새벽 윤슬이 반짝일 때 깨달음도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야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먹을 게 지천에 널려 있으면 싸움을 안 할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었다. 새벽 6시 이전부터 근 1시간 여를 지켜보았는데 100여 마리가 넘을 듯한 야크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간혹 머리를 딱딱 부딪히며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 다. 대개 체급이 비슷한 녀석들끼리 서열싸움을 한다. 아주 체급이 월등이 크거나 작으면 서로 잽이 안 되는 걸 기가 막히게 알고 있는 거 같았다. 큰 녀석은 싸우는 녀석들 곁에 슬그머니 다가가 '얘들아, 고만 좀 하지'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대체로 방임이다. '어이구 녀석들아, 힘 좋을 때다, 늬들은 싸워라, 나는 이 새벽 맛난 풀을 더 뜯으련다' 하고.



어느 경우는 한 5분 정도만에 싸움이 싱겁게 끝나기도 하지만 한 팀은 거의 30여분을 밀고 밀리고를 반복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김을 푹푹 뿜어가며 대가리싸움을 하다 곁에 있던 녀석들이 합세하기도 하고 또 말리려던 다른 녀석과 엉뚱하게 붙기도 하는 게 사람들 싸우는 꼴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아, 평화는 그냥 오는 게 아닌가 보다.


어디서나 먹을 게 풍부하면 다 제자리에서 욕심내지 않고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던 것 역시 착각이었다. 서열 싸움은 그냥,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본능 아닐까 궁금해졌다. 이 싸움이 도대체 언제까지 가려나 동영상을 찍던 내가 지레 동영상을 접기도 했다만, 그렇게 박 터지게 싸우던 녀석들이 7시 되기 조금 전, 여기저기 몇 사람이 나와 발을 구르거나 막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을 치거나 두 개의 막대기를 두들기며 소리를 내 몰아내자 모두들 우르르 캠프 밖으로 밀려나갔다. 그럴 때 싸움은 또 의미가 없어진다. 다들 겅중겅중 뛰어 달아나기 바쁘다. 아마도 적당히 먹어 풀을 뜯고 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구석구석 살뜰히 입질하고 돌아다니더니.



그렇게 지리하게 오랫동안 싸우던 녀석들 말고는 대체로 득득 소리만 내며 풀 뜯기에 여념이 없는 것 역시 사람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다수의 평화가 전체의 평화는 아니었지만 일부의 싸움이 또 전체의 싸움은 아니기도 했다.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기싸움을 바라보며 싸움은 왜 생기는가, 각자의 욕구는 어떻게 다른가, 싸움보다 평화를 택하고 안전을 택하는 쪽도 있을 테고 기를 쓰고라도 자기 위치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상대도 있으리라. 바라는 바를 묻기는 하려나? 동물끼리도 분명 자기들만의 소통법이 있으리라. 소통이 불통이 되면 싸움이 시작되겠지.


사람들끼리는 물을 수 있는 소통법이 말이든 수화든 글이든 그림이든 있으니 다양하게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묻지 않고 단정할 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문은 쉽게 닫혀버리고 아프게 돌아서게 되는 거 아닐까. 차마 물을 수 없는 상황도 있을 테고 물음과 억울함을 목울대까지 올렸다가 꿀꺽 삼키기도 하리라.



마냥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던 순한 무리의 야크 떼를 끊김 없이 한 시간 내내 지켜보며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를 명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다르고도 다른 이들끼리 순하게 다다를 수 있는지, 혹은 아프지 않게 저대로 경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



물음은 끝도 없이 이어지기도 하고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그래도 묻고 또 묻는 힘 마저 잃지는 않고 싶다. 물음만이 내게 살아갈 힘이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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