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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기록

일상기록

16. 일탈 후

by 조유상

일상이 소소하게 이어지는 걸 즐기던 날이었는데 한 달 보름 상관으로 두 번의 외국여행이라니...


무리였다. 짧은 몽골은 신선한 광활함이었지만 보름 간의 조지아와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세 나라를 종횡무진하기엔 무리수였다. 두 번 다 몇 년 전부터 이야기가 되었던 여행이었지만 이렇게 연이어 가게 되다니.


팔자 좋은 사람이 하는 투정처럼 들리겠다만 내 나이에 여러 나라 달리는 건 이제 끝이다, 맘 속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앞으로는 한 나라의 일부를 천천히 시간을 두고 머물기로 하고 매일 짐 싸는 허튼짓 따위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일탈은 일상이 깊어지다 한 번씩 향수병 도지듯 일어나야 제맛이지. 여행 시작은 주섬주섬 챙기고 알아보고 뭔가 준비할 때부터이고 큰 기쁨은 밥을 안 해도 되는 가벼움에 있다. 도수에 따라 새 안경을 맞추듯 새로운 여행지를 바라볼 눈에 다른 렌즈를 살짝 갈아 끼운다. 설렘을 집어넣으니 짐은 묵직해진다.


붕 뜨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집들과 산하가 거리 비례, 현실에서 까마득히 멀어진다. '아웅다웅'이 부질없어 보이는 시점이다. 이 조감도만으로도 일탈은 선물이다. 뭉글뭉글한 구름더미 위에 올라앉아 손오공이 된다. 작은 마술을 우랑 바리바라바! 외치며 어설픈 재주를 부리는 손오공도 되었다가 저팔계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두 끼에서 세끼를 우걱우걱 먹어대고, 들었던 말도 사오정처럼 잘도 잊고 엉뚱한 소리도 한다. 그러다가 드물지만, 삼장법사 지팡이에 딱 얻어맞은 듯 설핏 깨달음도 온다.


마음이 붕붕 뜨는 비행기 안에서도, 비행기에서 다시 내릴 때쯤이면 삶이 보이고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디서나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이 한꺼번에 보인다. 일탈이란 양탄자에 다 가려지지 않는 일하는 이들은 여행길 곳곳에 촘촘하다. 오늘은 내가 노는 사람이고 다른 날은 그들이 노는 날이기를 빌어본다.



긴 여행을 끝내고 되짚어 올 날이 가까워오면 내둥 잘 먹던 현지식을 앞에 두고 김치찌개가 그립고 얼큰한 짬뽕국물이 당긴다. 시원한 냉면을 후루룩 들이켜고 싶고 향긋한 깻잎나물이 눈앞에 떠간다. 김포공항에 내리면서 바라보는 국산 하늘은 먼 나라 이웃나라로 끝없이 이어져 있음을 알면서도 왠지 긴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돌아온다는 건, 돌아올 데가 있다는 건, 떠돌다 익숙한 공간으로 복귀한다는 건 어찌나 편안한지.



한동안 멍하니 무엇부터 해야 할까 허둥대기도 한다. 갈 때보다 묵직해진 캐리어를 끌어다 놓고는 벌러덩 잠시 침대에 눕는다. 등허리를 탄탄히 받아주는 자리에 몸을 눕히는 달콤함에 젖어 본다. 이내 수시로 비 오고 흐리는 날씨를 검색해 보고는 짐을 모조리 꺼내 정리하고 빨래부터 돌린다. 차례로 밖에 널어놓고 캐리어도 닦아 아슬아슬 남은 햇볕에 소독한다. 거의 하루를 날아온 셈인데도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아 뒤척인다. 남은 피곤은 목감기로 살그머니 찾아와 쉬라고 몸을 토닥인다. 나갈 일을 포기하고 며칠 몸에게 직수굿이 따른다.



일탈 후 허탈이 나른하게 찾아온다. 깊은 잠, 사로잠, 자투리잠, 도둑잠으로 다시 여행하며 죽음처럼 맞이하다 일상으로 느린 걸음하고 있다. 쑴벅쑴벅한 눈을 비비며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끓인다. 밥, 김치, 된장찌개를 먹으며 여행이 꿈속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비로소 일상의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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