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도 명실공히
그제 홍성사는 친구가 다녀갔다.
둘째 사위가 일이 있어 제주 내려오는 길에 딸과 손주랑 같이 묻어서 온 거였다. 딸은 4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고 배 안에 내년 2월이 산달인 임산부다. 애 둘 되기 전에 함께 엄마랑 여행을 가자고 해서 온 거지만, 자긴 사실 '식모'로 따라왔단다. 4살 배기 손주는 하루에 400번이나 질문을 한다며 일일이 대답해 주기 어렵다면서도, 다 같이 제주 우리 동네 근처에서 점심을 먹을 때 보니,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대답은 물론 식탁에서 밥에 생선 발라 올려주고 먹여주는 건 그 친구였다. 아빠는 반찬을 덜어 놔 주긴 했지만 할머니가 보모이자 보호자였다.
자기 딸이 임신하고 입덧이 심해지면서 입이 짧아 삼시 세끼를 해줘야 한단다. 수원 자기 집을 두고 다음 주부터 바로 엄마인 내 친구 집에 내려와 일 년을 지내기로 했단다.
'어이구, 너 어쩌면 좋냐? 일 년 동안 죽었네. 밥 해대랴, 손주 봐주랴 큰일 났다, 너.'
전화로도 했던 말을 또 한다.
점심 먹으러 간 식당은 맛집인 데다 일요일이라 대기 줄이 엄청 길었다. 기다리는 동안 친구의 손주는 엄마 옆에 앉았다 아빠한테 안겼다 매달렸다 하며 수시로 종알거렸다. 손주가 없는 나는 그 해맑은 눈동자와 어휘력이 좋아 말도 잘하고 상상력도 풍부한 녀석을 바라보며 쏙 빠져들어갔다.
몇 살이에요? 이름은 뭐고?
4살이란다. *우.
아, 그럼 청개구리 많이 먹을 때네. 청개구리 많이 먹었어요?
(...)? 청개구린 안 먹었는데... 개구리는 한 마리 봤어요.
응, 그랬구나. 아마 앞으로 청개구리 많이 먹게 될 거예요.
*우는 아직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마 이상한 할머니다 싶었겠지.
식탁에서 밥을 먹다 나한테 뭘 물어보며 "친구 할머니는..."하고 말하니 친구 딸내미가 "할머니 친구니까 그냥 할머니라고 해도 돼"라고 말한다.
나도 얼른 받아서 "맞아, 그냥 할머니라고 해도 돼." 했다.
*우는 그제야 할머니라고 하며 나한테도 말을 시키곤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친구의 딸과 사위, 눈에 아삼삼한 귀여운 손주 녀석은 먼저 숙소로 가고 나는 친구랑 근처 오름을 두 바퀴 걸었다. 걸으면서 자기는 걷는 게 정말 좋단다.
오름을 걷다 배 깔고 누운 나무 등줄기에 잠시 앉았다. 나무 우듬지 사이로 볕뉘를 올려다보며 친구가 말한다. 한 번은 어찌나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지 한밤중에 무조건 길을 나섰단다. 그 친구 집은 홍성에서 청양 가까운 산골인데 화가 나니까 하나 무서운 것도 없더란다. 세 시간여를 걸어 홍성 버스터미널에 가서 먼저 살던 비어 있던 집으로 가 가족들과 전화를 차단한 채 몇 달을 혼자 지냈단다. 화났을 때 방전하기로 걷는 거 만한 게 없는 모양이다. 우와, 강적인데? 대단해요!
그런 기억들을 나누며 걷고 쉬고 자연을 맞이했다. 다른 곳도 구경시켜 주고 요즘 한창 아름다운 제주 억새밭 앞에서 사진도 찍어준다. 활달한 그 친구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입도 두 팔만큼 한껏 벌리고 웃는다. 콧바람을 잔뜩 불어넣고 모처럼 자유시간을 맞이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같이 뻥 뚫린다. 집에서 들깨 터느라 고생 실컷 하고 왔을 텐데, 여기 와서까지 손주 봐주느라 고생이다니...
올 때는 사위가 운전해 오고 갈 때는 내가 서귀포 숙소에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같이 걸으면서 너무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워하는 친구를 바라보며, 너 앞으로 어쩌냐 힘들어서... 그랬더니, '그래도 생명이잖아. 생명을 받아서 키우는 건데 내가 일 년 희생하면 그 담엔 제(딸)가 키울 테니까.' 한다. '에구, 착한 엄마다. 야, 그래도 돌밥 돌밥(돌아서면 밥) 해야 하잖아. 거기다가 주말이면 사위까지 와 있을 텐데 힘들어서 어째...? 우리 친구 딱해서' 하니까, '사위가 오는 건 진짜 힘들어. 딸 세끼 밥 꼭꼭 챙겨줘야 하는 것도 쉽진 않은데 사위는 더 어렵더라구.' (두) 말하면 (잔소리지...) 한숨을 내 쉬며 공감한다. 아니, 백 프로 공감 못한다. 아직 진짜 할머니가 못 되어봐서. 하지만 순도 높은 공감 비스름한 걸 할 수는 있다. 근데..., 사실 배 아프다.
나는 늦게 결혼해 현재 29, 24살 아들만 둘이고, 26살 이른 나이에 동거 1년 한 뒤 결혼한 큰아들이 있지만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해서 손주는 없다. 큰아들 내외는 지구가 곧 멸망해 갈 텐데 이런 시대에 아이를 낳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곧 닥쳐올 멸망 앞에 다음 세대가 아파하는 걸 볼 자신이 없다고. 처음엔 그 말이 심장 철렁할 만큼 충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통에도 애는 낳고 키웠단 말이지... 하는 내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야, 우리가 유기농을 하는데 유기농은 순환 아니냐. 먹고 싸고 돌리고 돌리고 다 흙으로 가고 다시 태어나고 그러는 건데 자식도 낳아야 순환이 되는 거지'라고 말한들 녀석의 귓바퀴만 간질이다 마는 말이다. 순환은 엄마아빠까지로 충분해요, 하는 걸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나? 아님 요새 젊은이들 생각을 내가 잘 모르는 걸까? 물론 결혼 안 하려던 30년 전의 나야말로 그런 면에서 선구자 아니었던가.
"애 낳으면 엄마가 봐줄 거야?"
"아니, 엄마 바빠! 할 거 많아."(참, 냉정하게 한 큐에 잘라버린다. 볼 책도 쌓여 있고 글도 쓰고 싶고 춤도 추고 싶고 첼로도 해야지. 꽃밭도 가꿔야지...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쩝.)
"거 봐"
"아니 니 새끼를 니가 키워야지, 왜 우리가 키워주냐? 우리도 느희들 다 우리 둘이 키웠어야"
픽 웃는 아들.
혹시 몰라서 말 뒤끝은 붙잡고서, "어쩜... 아빠는 애기 봐줄지도 몰라~. 아빠 애기 잘 봐." 하며 말미를 둔다.
"됐어. 우린 그냥 안 낳기로 했어."
"그래도 엄만 많이 서운하다."
"꿈도 꾸지 마셔요~!"
아이코, 그 엄마에 그 아들인감. 손주 안 봐주겠다고 단칼에 거절한 매정한 엄마에 매정한 아들놈 같으니라고.
거기까지만 했다. 그 말 듣고 잠시, 한 달 정도 우울했었다. 그러다 탁 털어버렸다. 제 인생이고 저희 둘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우리가 이리왈 저리왈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전적으로 애 봐줄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우고 그 녀석들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느라 농사 빡시게 짓고 그러노라 세월 다 보냈잖아. 애 낳고 키우면서 경험한 것들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놀라움과 기쁨이어서 힘들어도 힘든 게 상쇄된 삶이었지만, 꿈도, 즐거웠을 시간도 다 차곡차곡 개켜 접어둔 시간 속에 살았잖아. 그래, 너희가 꼭 그럴 필요는 없지. 너희 좋을 대로 살면 그걸로 됐다. 혼자 그렇게 차분히 마음 정리를 하고 나니 역시 홀가분했다. 단 한 번도 그 뒤로 아들며느리에게 애를 낳아야 한다고 종용한 적 없다. 내가 아무 말 안 하니까 바깥사돈이 그런 말 한 적이 있지만,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하고 말았다.
그런 녀석들이 일 년 반쯤 전, 커다랗고 시커먼 유기견 '엄지'를 입양했다. 생명을 기른다는 건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잠시 반대했지만, 저희들 뜻이 그렇다는데... 말릴 수 없었다.
다만 '절대 봐달라거나 맡기는 건 안 된다'라고 못 박아 말했건만 이 원칙은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 (이미 그럴 줄 알았다만.) 저희가 여행 갈 때나 볼 일 있을 때마다 만만한 우리 집에 맡기는 통에 아침저녁으로 엄지 산책시켜야 하는 몫을 심심찮게 떠맡곤 했다. 건넛마을에 살면서 개 산책시키며 겸사겸사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엄지, 할머니다 할머니, 엄지, 할머니 좋아하잖아"하는 아들. 아, 이 노무 시키 때문에 내가 개할머니가 되어 버렸네ㅠㅠ. 나 개 손주로 둔 적 없다. 이럴 땐 멀리 살고 싶다니까... 생각은 그렇게 해도 아들 녀석이 엄지를 데리고 오면 좋아한다는 고구마 말랭이를 일부러 해뒀다가 서너 개씩 입에 물려주는 건 나다. 남편을 좀 무서워해도 나한테는 꼬리도 치고 다가온다. 내가 제주살이 하는 동안 할배랑 둘이 많이 친해졌겠지? 개한테 어린 시절 물려 본 적이 있는 나는 개가 무척 무서웠었다. 그걸 극복하게 된 계기가 있었지만, 개에게 숨겨진 늑대본능을 나는 아직도 속으로 무서워하긴 한다. 근데 아들 며느리가 데려온 개 덕에 무서움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쓰다듬고 있다. 하지만 방에는 들이지 않는다. 아들네 가족이지 아직 우리 집에선 현관 입구까지만 허용하는 가족이다. 미안, 엄지. 나도 우리 식구도 그게 허용이 안 된단다.
애들이 결혼하고 나서부터 남편이 그랬던 거 같다. 어쩌다 카페에 친구나 식구들이랑 가서 갓난쟁이나 애기들이 그 공간에서 보이면 남편 눈에서 꿀이 떨어지며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 있다. 아마 저쪽에서 허용하면 바로 안아줄 태세다. '늙었나 보네(하긴 늙었지, 뭐), 애기들 좋아하는 거 보면. 그렇게 좋아?' 하면 '이쁘잖아' 한다. 아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지만 어쩌랴, 우리 복이 거기까지인 걸. 아직은 녀석이 젊고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희망을 접기엔 이르다! 막둥이는 24살이니 뭐 손주 안아볼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겠다 싶다만, 내일 일도 모르는데 먼 훗날을 어찌 알리오. 알릴레오도 모를 일이다.
할머니 나이인데 친손주가 없으니 누가 나더러 할머니라고 하면 생경하다. 36살까지 결혼 안 했으니 그 나이 때에 어딜 걸어가다 누가 '아줌마'하면 나 아닌 줄 알았던 것처럼, 여전히 낯설고 적응이 잘 안 된다. 나는 아줌마 나이로 보이는 여성에게 '아줌마'라고 퉁치듯 불러본 적이 별로 없어서 어딘지 다른 나라 사전에도 올라 있다는 '아줌마' 호칭에 익숙지 않았다. 더더구나 할머니라니. 누굴 진짜 할머니로 아나? 그런 마음이 아직도 쪼끔은 있다.
실제로는, 사람 새끼, 사람 친손주새끼한테 할머니 소리를 듣고 싶다. 농사짓느라 우리 자식들하고 시간 함께 보내는 데 인색했던 거 보상하듯 널널이 손주 녀석들 시간 곁에 어정거리고 싶다. 고물거리는 귀여운 손가락을 붙잡고 눈을 맞추고 걸음마를 걸리고 싶다. 남편과 손주를 사이에 두고 고사리 양손을 잡아 붕 띄우며 하늘 구경시켜 주고 싶고 젖내 나는 뽀얀 볼때기에 볼을 비비며 마구마구 뽀뽀도 하고 싶다. 똥기저귀도 갈아주고 궁둥이 토닥토닥하며 말캉한 녀석을 조물러 터트릴 듯 안아주며 물고 빨고 싶다. 하루하루 고실고실 피어나며 재롱이 늘어가고 이빨 하나씩 대문니부터 나고 젖니 빠지는 달강새를 보고 싶다. 뽀샤시한 새 생명을 키우는데 한 축 거들며 밭에도 데리고 나가 온갖 곤충 보여주고 흙맛도 뵈주고 세상 꽃 향기도 함께 맡으며 이야기 들려주고 싶다. 이 거리 저 거리 각거리 하며 어린 다리를 끼고 놀다가 자울 거리면 등허리에 포대기 둘러업고 들판을 한가로이 노래부르며 걷고 싶다. 볍씨를 싹 틔어 돋은 싹을 모판에 심었다 소복이 모판에 초록잎이 나오면 떼다가 논에 심어두어 활개 치며 자라듯, 고물거리는 생명 씨앗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떡잎부터 튼튼히 햇살마중하며 절대 앞서 가지 않고 뒤따르며 녀석이 스스로 해 나가는 걸 손뼉 치고 격려하며 지켜보고 싶다.
아아, 아니야 아냐, 이런 상상하면 안 돼. 나, 하고 싶은 게 제법 많은 할머니, 아니 할머니 되지 못한 할머니란 말이야. 아악....
이거 뭐지 나 할매병 도지는 거야? 급하게 도리질한다. 그제 그 녀석은 왜 내 눈앞에 나타나 숨었던 나의 욕망을 휘휘 저어 놓고 갔담. 꿈같은 상상 뒤에 정말 나는 배가 아프다. 나중에 현실 할머니가 되면 언제 그랬냐며 입 싹 씻을지 몰라도 그렇다.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이며 동영상 보여주려 하는 친구들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야야, 제발 고만들 해라, 배 아프거든! 돈 내고 자랑질하던지.아, 참, 요샌 돈 줄게 자랑질 좀 그만하라 하던가? 나도 남 배 좀 아프게 하고 싶다. 명실공히 당당히 할머니가 되고 싶다.
#당당히 할머니 #무늬만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