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OO날, 그게 뭐라고
어제는 어버이날
가족 단톡방에 막내가 농업기술센터에서 만들어왔다며 케이크 사진을 올렸다.
어버이날이 뭐 특별한 날이겠어? 하면서도 가족방에 식구들이 올려준 소식들은 반갑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조금쯤 마음에 고인다. 안부 전화만으로도 충분하다.
남편은 하필 이날 치질 수술을 한다고 꾸러미작업 끝나자마자 입원했고
나는 글 쓴다고 제주에 혼자 와 있으니, 애들도 각각이다.
큰아들은 새로 시작한 지 몇 달 안 된 직장에서 혼자 동분서주하고 있고 며느리는 우울증이 언제 도질지 모르니 기대하지 않는다. 막내아들의 애교스러운 케이크 사진이 고맙다.
독서모임서 물영아리 오름을 다녀와 점심 알차게 먹고 헤어져 도서관 나들이 중이었다. 막내가 전화를 해서 한참 흐흐거리며 징그러운 애교를 떨고 전화 속으로 사라지고 따로 연락 없는 큰아들이 궁금했다.
어버이날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 큰아들이 전화를 했다. 오~ 아들! 반갑네 했더니
엄마 어제 전화 못 드렸슈 한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 톤을 조금 높여
엄마, 서운해 뒤질 뻔했네! 했다.
아이구, 울 어무이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준비한 강의들 시작하는 날이라(지역 정신건강 쉼터에서 일함) 정신없이 바빴슈.
그래, 뭔 일이 있었겠지 했어. 괜찮아. 많이 바빴겠다. 오늘 고생하고!
예~.
막바로 '괜찮아'하지 않고 서운하다는 말 한마디 했고 그걸 바로 알아차리는 센스쟁이 아들이라 고맙다.
아닌 척, 괜찮은 척하지 않기로 한다. 사실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지만 말 안 하고 가면 진짜 서운함이 남을 수도 있으니까. 가까운 사이라도(가까운 사이일수록) 안 좋은 감정을 덮어두고 덮어두다 보면 정말 은근히 쌓인 감정에 휘달리게 될 수 있다. 말 한 마디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 풀어지고 감정 소모할 필요조차 없는데 말이다. 매일 두 다리 쭉 펴고 잠들고 싶어 하는 나로선 걸리는 걸 굳이 만들지 않으려 한다.
보통 엄마들은 서운한 감정을 자식들한테 잘도 숨긴다. 하지만 치맛자락 밑에 여우꼬리 감추지 못하듯 다 보인다. 우리 엄마가 겉으로는 그랬다. 자식들에게 언제나 헌신적이었고 진심이었다. 본인이 낳아준 친엄마를 딱 한 번 보고 헤어졌으니 뼈에 사무친 엄마의 그늘은 깊었다. 엄마는 진심 우리에게 진짜 엄마이고 싶었다. 몸이 허약한 사람이었지만 정신력 하나는 투철해 옛날 타구에 한 웅큼씩 각혈을 하면서도 자신이 죽으면 이 아이들 자기 꼴 만들까 봐 물이라도 동이동이 머리에 여서 항아리마다 가득가득 떠다 놓아야 마음이 놓였단다. 정신력으로 버틴 세월이었다. 몇십 년 후, 엄마가 기관지 사진을 찍었을 때 의사가 묻더란다. 폐결핵을 앓으셨냐고. 어스름한 기억을 더듬어 가던 엄마는 그때 목에서 피를 쏟던 게 그럼 폐결핵이었구나를 떠올렸다. 결핵을 앓았던 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엄마의 폐는 우리가 야금야금 갉아먹었던 게 아니었을까. 거미 새끼들이 어미 가슴을 파먹고 자라듯이.
그런 엄마의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이 우리에겐 버겁고 힘들었다. 특히 막내인 나한테는 과잉이었다. 말년에 엄마는 결혼한 젤 위 언니와 큰오빠에 대해 한탄을 하며 '네가 큰딸이었어야 하는데...' 하는 말을 가끔 하셨다. 그런 말 들으면 엄마가 나를 인정하는 게 기뻤다기보다, 그런 소리 언니한테는 절대 하지 마쇼, 듣는 언니 기분 나쁠 테니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 엄마는 내가 큰딸이길 바라면서도 욕도 참 많이 했다. 늦게까지 시집을 안 가고 애살받치고 있었으니 그 애증의 관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엄마의 욕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지지 않고 맞섰다. 엄마는 지금 나에게 욕을 하는 게 아니라, 언니와 큰오빠한테 화나는 걸 나한테 한꺼번에 분풀이하고 쏟아내고 있는 거라고. 왜 애먼 내가 욕을 먹어야 하느냐고.
사실 맞는 말이었는데 그래서 한 번 더 욕을 얻어먹었고 엄마는 눈을 흘기며 돌아 섰다. 그런 엄마가 큰며느리를 얻고 나서 당신 생일이 다가오면 일주일 전부터 초조해했다. 며느리가 자기 생일을 기억 못 할까 봐. 나는 어련히 알아서 하랴고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미리 '어머니 생신날 음식해서 갈게요' 한 마디만 했으면 좋았을 걸 그냥 당일날 바리바리 음식한 걸 싸들고 나타났다. 일은 혼자 죽어라 했지만 눈치 없던 큰 올케언니는 엄마에게 좋은 소리 듣지 못했다. 엄마의 초조함이 울화로 넘쳐흘렀다. '기억 좀 못하면 어때, 못 할 수도 있지'가 안 되는 엄마였다. 궁금하면 전화해서 얘야, 이번 내 생일엔 나가서 먹을까 그런 식으로 해도 되었을 텐데, 미리 전화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 결국은 생일날 폭발하는 건 또 뭔지. 어떤 때는 하도 답답해서 내가 새언니한테 전화해서 어떤 계획 있으세요? 나가 먹을까요? 하고 묻기도 했다. 음식 잘하는 며느리들을 얻은 엄마는 결국 잘 대접을 받으면서도 미리 언질 안 한 거에 화가 나 혼자 마음 보대끼며 북 치고 장구치고 그랬던 게다.
<지나쳐간 사람들>이란 아주 오래된 우화가 있다. 호리병 속에 갇혀 버린 거인?이 자기를 꺼내주기만 애타게 바라며 꺼내준 이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쳐만 가니 나중엔, 나를 꺼내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간다. 결국 꺼내어준 이를 죽이려 하던가, 아님 자기 대신 그 병에 가둬버리는데 지혜를 발휘해 어떻게 그 덩치가 작은 호리병 안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물어본다. 거인이 우쭐대며 자기 몸피를 줄여 쏘옥 빨려 들어가자 이 사람은 얼른 병뚜껑을 막아버린다. 나도 이 폭죽 거인 엄마를 생일날만큼은 가둬버리고 싶었다. 생일날 폭죽놀이는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했으니까.
기다림이란 폭발물이 살금살금 빠지직 대며 타들어가다 터져 버리는 타이밍은 생일 일주일이나 삼사 일 전부터 시작해 당일날 끝났다. 왜 그토록 자기 생일을 챙겨 받고 싶어 했을까. 그게 결핍이었으니 그렇게라도 해 자기를 존중받고 싶었던 걸까? 아무리 존중받고 싶더라도 그렇지, 나는 그 과정을 낱낱이 보는 것만으로도 질렸다.
엄마 생일이면 몇 번이나 터졌던 폭죽 후 재는 고스란히 우리가 뒤집어썼다. 그 덕에 나는 결혼한 뒤 기념일을 미리 알린다. 내 생일을 식구들이 기억 하나 못하나 피말릴 필요 없다. 가끔 장난 삼아 물어보긴 하지만, 새 달력을 받으면 나는 식구들 생일과 기념일에 미리 다 동그라미를 크게 쳐 놓는다. 다 볼 수 있는 부엌 달력에. 그리고 혹시라도 애들이 기억 못 할 거 같으면 미리 말해주고 받고 싶은 선물도 서로 말하게 하고 나도 그런다. 우리 집 큰아들만 빼고 두 부자는 특히 선물 고르는 걸 아주 힘들어한다. 고민을 생략케 하는 게 상책이다.
상황이 안 되면 내가 나한테 선물하면 되니 기대하고 바라면서 초조해하는 거 딱 질색이다. 엄마한테 데었기 때문이다. 사람 쓸데없이 피 말리는 작전을 제발 OO날일랑 하지 말기로. 어버이날도 그래서 수월히 지나갈 수 있었다.
엄마 덕이다. 그러니 엄마는 고마운 사람이다. 조바심이란 알람을 꺼지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