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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Jun 09. 2022

9. 파리는 왜 예술의 도시가 되었을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어디선가 예스러운 마차가 나타난다. 이 마차를 타면  에포크라고 불리던 파리의 황금기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만레이, 스타인,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달리와 같은 예술가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춤추고 이야기하며 꿈같은 보낸. 이렇게 영화 '미드나잇  파리'의 한 장면이 현실이 되는 곳이 바로 프랑스 파리다. 

 골목골목 남아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이 영화 속 마차가 되어 우리를  에포크 시대로 이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세잔, 로트렉, 마티스, 고흐, 피카소, 모딜리아니, 샤갈......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파리. 오늘은 이런 파리가 예술의 도시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프랑스 아카데미 중심의 전시가 열리던 루브르 '살롱 캬레'


  고딕 양식의 생드니 왕실 성당,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 프랑수와 1세, 예술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루이 14세를 계보로  열정을 이어오던 프랑스 예술은 명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변화를 겪는다. 

 이전 프랑스 예술의 중심에 있던 권위적인 왕실이 사라지고 왕족, 귀족들의 소장품은 유럽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루브르 궁전은 국립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그중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신흥 세력, 부르주아 시민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고 수집하며 그들의 후원자를 자처하였고 더 이상 예술은 소수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많은 니즈가 생겨난 만큼 프랑스 예술은 보수적인 아카데미와 이에 반발하며 보다 작가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나누어졌다.

신진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던 화상 '뒤랑 뤼엘의 갤러리'

 이때 예술을 소비하는 주요 고객, 유럽 왕족 또는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가 파리에 머물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오스만 시장의 도시 개혁이다. 쾌적하고 신식 문물로 가득한 파리는 상류층 취향에 딱 맞는 도시였던 것이다.

 사실 도시 개혁 이전 파리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이루어진 산업화로 많은 문제점을 양상하고 있었다. 빠른 도시화로 급격하게 많은 인구가 수도로 유입되며 19세기 초반 70만 명이었던 파리 인구는 25년 동안 백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반면 아직 중세 도시에 가까웠던 파리는 모든 제반 시설이 이를 수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였으며 열악한 공공 위생으로 시민들은 각종 전염병 및 질병에 노출되어 6개월 동안 1만 명 이상의 사람이 감염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파리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동, 시위는 나폴레옹 3세에게 지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오스만 남작(좌)과 파리 도시 개혁 당시 지도 (우)

 결국 이 복합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파리 시장이었던 오스만 남작은 나폴레옹 3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파리 도시 개혁을 시행한다. 프랑스와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도시화를 이룬 영국 런던을 모델로 도시의 순환(물, 공기, 사람, 교통, 재화 등)을 원활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대대적인 변화가 작되었다.

 가장 시급했던 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수도 및 600km에 달하는 지하 하수도를 설치, 공기 순환을 위하여 4만 5천 그루의 나무를 추가로 심었으며 도심 공원(몽수리, 몽소, 쇼몽) 및 숲 정비(블로뉴, 방센)를 진행하여 녹지 공간을 확보했다. 더불어 12구의 파리 구역을 20구까지 확대하고 대로, 외곽 순환도로를 재정비하여 사람 및 교통 이동을 원활하게 했다. 파리를 상징하는 오스만 양식의 건축물 또한 그 산물로 이전보다 약 3배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한 건물에서도 층별로 다양한 계층이 거주하여 사회적 단절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모습

 이때 동시에 진행된 파리 만국 박람회(1855-1937, 총 7회 개최)새로운 모습의 모던 도시전 세계에 알리는 촉매제가 되기 충분했다.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는 물론 그들의 주요 고객이 되는 부유층을 파리로 이끌었는데 그중 가장  규모의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58개국이 참여, 무려 5천만 명이 방문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특히 당시 콘셉트, '빛의 도시' 마케팅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늦은 밤까지 빛나는 도시로 파리를 먼저 떠올렸는데 이렇게 눈부신 파리는 빅토르 위고, 발자크, 에밀 졸라, 프루스트, 헤밍웨이 그리고 인상주의 화가들과 같이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어 영원히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의 <밤의 몽마르트 대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건설된 에펠탑, 오르세, 그랑팔레, 쁘띠 팔레, 알렉산드르 3세 다리는 지금도 파리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업화의 상징인 철재와 유리로 이루어져 높은 천장을 갖추고 있으며 당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에 따라 자연의 곡선, 꽃과 식물의 패턴이 새겨진 화려한 금빛 향연에 절로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데 샹젤리제를 따라 산책하며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의 파리를 직접 만나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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