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TV 뉴스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마지막 날씨 기사를 전하던 중 뉴스 PD가 인이어로 뭔가를 지시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나는 다소 당황했지만 방송을 오래 하다 보니 생긴 눈치로 여기서 끝내 달라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방송은 사고 없이 끝났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자주 찾던 이비인후과를 방문했다. 의사 선생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을 하자 선생님은 진료 의뢰서를 써줄 테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종합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보고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담당 교수님은 메모지를 한 장 꺼내더니 뭔가를 적었고, 나에게 그 메모지를 건네줬다. 메모지에는 열글자가 적혀 있었다.
'상반고리관피열증후군'
난생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병명을 적어준 이유도 흔한 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귀 안쪽 내이(內耳)에는 고리관이 3개 있다. 그중 가운데 우뚝 솟은 상반고리관은 딱딱한 조직으로 둘러싸여 있다. 뇌와 가깝게 붙어 있는 이 고리관의 딱딱한 조직은 뇌를 통해 전달되는 진동과 소리의 간섭을 막아줘 내 몸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와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잘 구분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이 고리관에 '피열', 그러니까 아주 작은 구멍이 생기면서 내 몸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가 크게 증폭된다. 계단을 오를 때 심장박동이 빨라지면 내 심장소리가 들리고, 내 몸의 관절에서 나는 소리들도 크게 들린다. 맨발로 걸으면 발과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자가강청이라는 증상, 즉 내 말소리가 마치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혹은 목욕탕에 있는 것처럼 먹먹하고 크게 들린다. 내가 뉴스를 진행하면서 뉴스 PD의 말소리를 제대로 못 들은 것도 내 말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리가 묻혀버린 것이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눈을 감고 눈동자를 굴리면 눈동자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린다. 음식을 씹으면 음식 씹는 소리가 마치 폭죽 터지는 소리처럼 들려서 어른들과 식사를 할 때는 어른들의 말소리를 잘 듣기 위해 중간중간 식사를 멈추곤 한다. 또 이 질환이 고약한 것은 어지러움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소리로 인한 진동이 걸러지지 않기 때문에 내 말소리로 인한 안진(눈 떨림)과 어지러움증도 찾아온다. 9시 뉴스를 진행할 때도 이런 증상 때문에 뉴스를 하는 동안 프롬프터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내 말소리 때문에 눈이 떨리면서 프롬프터가 마구 떨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 몸의 상태가 이러니 방법이 있나? 원고를 외우는 수밖에...... 다행히 내가 직접 쓴 원고여서 남의 글을 외우는 정도의 어려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벽히 외울 필요는 없더라도 뉴스 원고를 거의 외워둬야 한다는 건 참 고역이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한 약은 현재로서는 없고,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수술은 뒤통수 쪽의 두개골을 열어 상반고리관으로 접근하고, 피열된 부분을 본왁스로 덮어주면 해결된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양쪽 모두에 증상이 있고, 수술 후 난청 등의 부작용도 있을 수 있어 주변의 친한 의사들은 견딜 수만 있으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내 직업의 특성상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아나운서나 앵커의 스피치는 일반 대화와는 다르다. 더 크고 힘 있게 해야 하고 내 소리를 예민하게 모니터링하며 기술적인 스피치 기법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뒤늦게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 중 이 문제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백 퍼센트 나의 퍼포먼스를 다할 수 없음으로 인한 실망감이 꽤 컸다. 남자 아나운서에게 KBS 9시 뉴스 앵커 자리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고, 내가 9시 뉴스의 앵커가 됐다는 것이 방송가 사람들에게는 회자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내가 최고의 퍼포먼스를 다할 수 없을 때 나에게 찾아온 최고의 자리는 선물이라기보다 오히려 고통에 가까웠다. 제대로 들을 수 있음의 축복은 굳이 강조하지 않겠다.
한자 들을 청(聽)은 여러 부수로 구성되어 있다. 임금(王)은 백성의 말을 귀(耳) 기울여 듣고, 들을 때 눈(目)은 열(十) 개인 듯, 마음(心)은 하나(一)인 듯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옛사람들도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을 잘 듣는 것이 타인과 소통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은 오고 가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자신만의 메시지를 내뱉는 것을 두고 소통이라고 하지 않는다. 남북이 대치하는 비무장지대의 확성기 방송을 두고 우리는 소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동안 경청의 중요성에 대한 담론들이 많았다.경청이란 무엇인지, 어떤 단계가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사실 이 짤막한 글에서 그것들을 모두 정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스티븐 코비는 경청의 5단계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1단계 무시하기, 2단계 듣는 척하기, 3단계 선택적 듣기, 4단계 귀 기울여 듣기, 5단계 공감적 경청까지. 제목만 들어도,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하리라 믿는다. 굳이 이론적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감적 경청의 수준까지 도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한 친구 사이에도 언쟁이 생기고, 부부싸움을 하게 되며 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공격한다. 국가 간에도 자신들의 입장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 현실이 이럴진대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대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 고려하라는 주장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성인군자가 되라는 말이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솔직히 필자도 완벽한 답을 내놓기 어렵다. 나 자신도 완벽한 경청의 단계를 실현하는 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완벽한 수준을 위해 노력할 뿐. 보통의 사람들이 완벽한 경청의 단계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필자의 방송 실수담을 통해 경청을 위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나는대학교 4학년 때 아나운서가 되었고, 회사에 입사한 후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애송이 아나운서로서 처음 했던 TV 방송은 전주 국제영화제 현장에서 했던 리포팅이었다. 영화의 거리에서 거장과의 대화를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내가 인터뷰할 상대는 임권택 감독과 많은 작품을 함께한 故 정일성 촬영감독이었다. 스튜디오에서 '현장에 나가 있는 최동석 아나운서!'를 외쳤다.
"네, 저는 영화의 거리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거장과의 대화가 준비돼 있는데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정일성 촬영감독님을 소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시작하기 위해 정 감독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방금까지 내 옆에 있던 감독님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이라면 전혀 긴장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했겠지만 처음 방송을 해보는 어린 아나운서에게 이 상황은 정말 크나큰 난관이었다. 뇌가 굳어버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유체이탈이 되는 듯한 경험이었다. 카메라 옆에서 지켜보던 작가는 갑자기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를 외쳤지만 이윽고 작가는 더 격렬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마이크를 입에서 떼고 작가를 향해 속삭였다.
"왜~~?", "뭐~~?"
이제와 생각해도 환장할 노릇이다. 자료가 남아있다면 지금 당장 불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이불킥의 소재이다.
사건의 경위는 이랬다. 당시 PD 선배는 전주 국제영화제라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거장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전북대학교의 댄스동아리 학생들을 섭외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게 했고, 그 앞에서 거장과의 대화를 진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정감독께서 이런 분위기에서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안 된다며 방송 직전에 인터뷰를 거부하고 자리를 떠났던 것이다. 당시에는 갑자기 인터뷰를 거절한 그분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분께 큰 결례를 범했던 것이다. 우리는 거장의 말을 듣겠다면서 들을 준비를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니 그분은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인터뷰를 거부한 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철학과 영화인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거부한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경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경청은 결국 단순히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들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듣는 것에 앞서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 선택적으로 이해하고 메시지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잘 듣기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이 상대를 향해 있어야 한다. 상대의 말을 내 눈에, 귀에, 생각에, 마음에 담아야 한다.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들 중 안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인터뷰이가 말을 할 때 다음 질문을 생각하며 원고를 보는 사람들이다. 이런 방송인들은 생각보다 많다. 다음 질문은 원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답변안에 있다. 그 사람에 대해 공부하고 애정을 갖는다면 굳이 원고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답변 속에 다음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친구끼리, 부부끼리, 가족끼리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 내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잡생각이 대화의 단절을 가져온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내 입장을 전달할 준비만 하고 있는 것이다. 경청의 다른 표현은 '절제'이다. 내 생각과 판단을 절제하고 오롯이 상대의 생각과 시간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고도의 절제에서 경청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