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와 남는 자, 그 적당한 거리
미국에서 만난 고마운 인연
미국에서 생활을 한지, 어느덧 반년이 훌쩍 흘렀다.
시간이 쌓이다 보니 인간관계에 서툰 'I형'인 나조차도, 꽤 가까운 지인들이 생겼다.
(물론 외국인은 아니고) 아이들 학교 같은 반 친구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 가족들이다.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매일 얼굴을 보고,
아이들끼리도 가깝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겨서 서로 집을 돌아가며 함께 식사도 하고,
엄마들끼리는 가끔 티타임도 갖는 사이가 되었다.
낯선 미국에서, 마음을 터놓고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쁘고 안심이 되던지.
서툰 영어를 쓰지 않고 한국어로 마음껏 수다를 떨고,
궁금한 점들은 서로 묻고 알아갈 수 있다는 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한 가족의 엄마가 직장 문제로 먼저 한국에 들어가면서 이곳에서 맺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고작 1년 있다가 떠날 사람이면서,
이곳 사람들과 이렇게 정을 쌓아도 되는 걸까?'
뒤늦게, 이런 질문을 갖게 된 거다.
가깝게 지내던 세 가족 중,
두 가족은 1년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가족은 앞으로도 계속 미국에서 지낼 예정이다.
우리야 미국에 있을 때 가깝게 지내면서 도움도 받고, 외로움도 달랠 수 있어서 좋지만
얼마 뒤 우리가 모두 떠나고 나면, 남겨진 가족과 아이들이 느낄 상실감과 허전함은... 그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거리두기. 어쩌면, 남겨질 사람들의 본능일지도 모를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아이들이 처음 학교 생활을 시작할 때 쌀쌀하던 몇몇 엄마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한 차가운 말투와 눈빛..
처음엔 나도 한국 엄마들과 친분도 쌓고,
아이들 학교 생활 정보도 얻고 싶은 마음에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다가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조금도 곁을 내주지 않으려는 듯 차갑게 날을 세운 그분들의 표정과 태도에 한편으로는 속상하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들도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랬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남겨져야 할 사람들의
본능적인 '거리두기' 같은 거 일지도...
서로 마음을 주고, 의지하고, 친해졌다고 느꼈던 사람들이 기껏 1, 2년 있다가 떠나 버리고..
그렇게 원치 않는 이별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그들도 더 이상 같은 아픔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테니까.
그래서 장기거주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단기로 살다가 가는 사람들에겐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거리를 둘 수도 있겠구나.
차갑고 단단해진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저는 미국 1년 단기거주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내딛고 헤매는 나 같은 단기거주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분들도, 여전히 많다.
본인들도 똑같은 경험을 해봤기에...
미국에 처음 적응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나에겐 사소한 정보라도 누군가에겐 큰 도움이 될 거란 걸 알기에...
기꺼이 따뜻하게 정보를 나누고,
낯선 이의 물음에 성실히 답을 해주는 분들이 있다.
누구나, 어느 곳에서든 낯선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굳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어느 곳에서는 초보이자 이방인이 되는 상황이 끊임없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 나 역시, 언제든 마음을 내어
따뜻한 눈길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간이 길든 짧든, 마음으로 맺은 인연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믿으니까.
떠나는 사람이든 남는 사람이든...
그 인연의 끈은 언제든 다시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누군가에게
곧 떠날 사람처럼.. 오래 머물지 않을 사람처럼..
미리 마음의 벽을 세우지 않아야겠다. 다짐한다.
비록 잠시 머물다 떠날 사이라도 그 인연에 감사하며
멀리서도 가끔 서로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그것도 충분히 멋진 일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