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10월이다.
한국에서 10월이면 동네 나무들도 알록달록 단풍이 들기 시작할 테지만, 캘리포니아의 가을은 여전히 푸르다. 아침저녁으로는 기온이 15도 내외로 떨어지지만,
낮기온은 여전히 30도를 훌쩍 뛰어넘어 뜨겁다.
이런 걸 인디언서머라고 하는 걸까.
하루에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을 함께 보내고 있는 기분이다.
금요일 오후. 물놀이가 하고 싶다는 아이들 등쌀에 떠밀려 오랜만에 수영장을 찾았다.
여름방학이 지나고는 다시 수영장을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10월이 지나도 찬물에 몸을 담글 수 있을 만큼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뜨겁다.
물을 보자 서슴없이 풍덩 뛰어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량하다. 확실히 이곳의 계절 시계는 한국과 다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아이들과 한바탕 신나게 물놀이를 하다가 반대편으로 건너와 조금 전 머물렀던 곳을 바라본다.
우리는 분명 그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우리는 그곳에 잠시 머물렀을 뿐. 우리가 떠난 그 자리는 지금은 비었고, 언젠간 또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거다. 잠시 머문다는 건, 저 빈 의자 같은 거구나. 싶었다.
요 며칠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을이 오고, 곧 겨울이 오면 미국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과 그동안 해온 일들을 돌아보며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왔다.
1년 사이에 뭘 해내겠다는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막상 또 아무것도 해낸 게 없는 것처럼 허무했다. 한 움큼 움켜쥐었던 모래가 어느새 스르르 빠져나간 것처럼 손에 쥐어진 게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이 그렇듯 우리는 그곳에 잠시 머물 뿐이다. 애초에 손에 쥘 수 없는 모래였다.
다만 머무는 동안,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수밖에.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었던 일들, 하려 했던 일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머리로만 계획하지 말고,
실제로 하나씩 해보자 다짐한다. 언젠가 이 시간과 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바라봐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신나게 물놀이를 마치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말에도 아무런 미련 없이 물밖로 나와 물기를 툭툭 털어내는 아이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