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람 Jun 05. 2023

3. 도움을 구하는 용기

-도움이 필요하다고 왜 말을 못하니?!

미국살이 준비 - 막막, 답답, 초조 3종 세트


낯선 나라에서 1년을 산다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1년 살이'.. 1년을 '살아내야' 하는 일이었다.

당장 우리가 살 집부터, 아이들 학교, 집안에 들어갈 살림살이들과 우리 가족이 타고 다닐 자동차까지..

모든 걸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세팅해야 했다.


아이들을 맘 놓고 키울 수 있을 만큼 안전한 동네는 어디인지,

영어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잘 적응할만한 학교가 있는지,

미국 집은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 학교 등록은 어떻게 하는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막막했다.


주변에 물어볼 곳은 없고, 매일 인터넷을 붙잡고 검색하는 게 일이었다.

그나마 요즘은 미국을 가거나, 미국에서 지내는 한국분들이 워낙 많아서

인터넷 카페나 동호회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카페와 채팅방을 오가며 관련글들을 찾아보고, 이런저런 질문을 올리면

감사하게도 정말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성심성의껏 알려주셨다.

미국 살이가 막막하기만 한 나에게, 그분들의 정보와 댓글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요,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덕분에 눈감고 코끼리 코를 만지듯 더듬더듬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도움을 청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해


사실, 나는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걸 지독하게 못하는 사람이다.

나의 부탁으로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나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민폐라고 생각했고, 내 부탁을 귀찮게 여길까 두려웠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의 손길을 내밀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미국행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다고 해서 절대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

설사 누군가 도움을 주려고 해도, 내가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거.

이렇게 도움을 받은 경험이 모여서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더 큰 손길을 내밀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문득, 방송작가로 일을 할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라디오 작가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생방송 한 시간을 앞두고 출연해야 할 리포터가 잠수를 타버렸다.  

성실한 친구라 방송원고가 조금 늦어도 그러려니 믿고 기다렸는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거였다.

방송 시간은 다가오고, 그 친구는 계속 연락두절이고.

급하게 아는 기자분을 섭외해서 다행히 그 시간을 넘기긴 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

방송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대체 왜 그랬는지, 방송을 펑크 낸 이유를 물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내놓은 답변은 이랬다.

원래 취재를 하기로 한 곳이 인터뷰가 잘 안 돼서 혼자 여기저기 다른 곳을 알아보다가

결국은 방송준비를 하지 못했다고.


미안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하는 용기


그 친구라고 왜 두렵고, 걱정되고,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구하지 못한 건, 아마도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보려는 책임감과

다른 누군가에게 차마 손을 벌릴 수 없는 자존심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일 거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끙끙대다가 결국은 상대방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 셈이 되어버린 셈이다.

 

만약 그 시간에 미안함을 무릅쓰고 나에게 도움을 구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최소한 생방송을 아무 예고 없이 펑크 내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 역시 막내작가였던 시절이 있기에, 이런 경험은 수도 없이 많다.

방송 섭외를 해놓은 곳에서 갑자기 촬영을 거부한다거나, 출연자가 갑자기 펑크를 낸다거나,

당장 내일 촬영을 보내야 하는데, 전날까지 아이템이 잡히지 않아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경험까지...


처음엔 나 역시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애썼다.

어쩌면 도움을 청할 용기가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지 모르겠다.

도움을 요구하는 건 곧 내 부족함을 인정하는 거였고, 내 모자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을 마냥 뭉개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미안함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를테니까.


진심으로 도움을 청할 때, 그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많지 않다.

때론 몰라서, 능력이 부족해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해도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르는 건 찾아서라도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서툴고, 모르는 게 많은 게 당연하다.

미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우리가 미국을 모르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누구에게든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용기가 조금은 생겼다.


도움을 청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인터넷과 몇몇 지인들에게 민폐녀가 되는 걸 무릅쓰고 이것저것 캐묻고 다녔다.

그 결과, '미국 정착 지원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덕분에 우리 가족이 지낼 집과 아이들 학교, 그 밖에 미국살이에 필요한 자잘하지만 중요한 일들

(자동차 면허 따기, 은행계좌 만들기, 인터넷 서비스 가입하기 등등)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체면이나 자존심 따윈 내려놓고, 미국 왕초보 모드로 도움을 청해 얻은

결과였다.


왠만한 일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한국에서와 달리,

미국에서는 물어보고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 끊임없이 여기저기서 툭툭 생겨난다.

소심한 성격탓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질문하는 건 여전히 힘들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본다.

때론 눈치껏, 가끔은 귀동냥으로, 여기저기 묻고 배워가다보면 20여년 전,

모든 게 서툴고 낯설던 대학 신입생 시절, 혹은 사회 초년생이었던 그때의 나로 돌아간 느낌도 든다.


마흔이 넘어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오히려 이런 경험이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한다.

백세 인생.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생은 끊임없이 배워나가야 한다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만,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살아가던 나를 내려놓고

전혀 새로운 곳에 나를 던져보는 경험이 그래서 필요하다는 거.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값진 배움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