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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1. 2023

[19] '구원 혁명' 윤석환, 최초 만장일치 신인왕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최동원이 타격 3관왕 이만수를 제치고 대망의 84년도 최우수선수(MVP) 자리를 차지했다. (10월) 9일 야구기자단 투표 결과 최동원은 70점을 얻어 64점으로 접근한 이만수를 따돌리고 MVP에 올라 부상으로 승용차 1대를 받았다. 이날 투표는 1위표 10점, 2위표 5점, 3위표 2점을 배당하는 지난해와 같은 방식을 적용했는데 최동원은 1위표 6개, 이만수는 4개를 각각 얻어 승부가 갈렸다.

최우수신인상은 12승8패25세이브를 기록한 OB 베어스 구원전문투수 윤석환이 110점을 얻어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한편 한국시리즈 MVP로는 7차전에서 결승 3점홈런을 날린 유두열이 투표결과 최동원(한국시리즈 4승)을 6-5로 누르고 영광을 안았다.』 <1984년 10월 10일자 경향신문>


1983년 초대 신인왕 박종훈에 이어 1984년 신인왕도 윤석환이 차지하면서 OB는 KBO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했다. 박종훈이 야수 최초 신인왕을 받았다면 윤석환은 투수 최초 신인왕. 여기에 윤석환은 ‘사상 최초 만장일치 신인왕’이라는 역사를 썼다.


 무엇보다 ‘최초 전문 마무리 투수’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윤석환은 베어스 역사를 넘어 KBO리그의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베팬알백] 19번째 주제는 1984년 신인왕 윤석환에 초점을 맞춘다.


신인 시절 윤석환 ⓒ두산베어스


● 김성근 감독 눈 밖에 났던 신인투수


 1983년 11월이었다. 성균관대 졸업반으로 OB 베어스의 마무리훈련에 합류한 신인 투수 윤석환은 "졸업 논문을 써야한다"며 갑자기 학교로 돌아갔다.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된 뒤 첫 훈련을 지휘하고 있던 김성근 감독은 자발적(?)으로 훈련을 빠지는 신인의 당돌함에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베팬알백] 편>에서 소개했듯이, 윤석환에 대한 김 감독의 첫마디는 “뭐 저따위가 들어왔어”였다.


 다음은 윤석환의 회상이다.


 “대학 시절 사범대 체육교육과를 다녔는데, 2학년 때까지는 프로야구가 없었잖아요. 졸업 후에 체육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3학년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진로를 놓고 고민을 했죠. 4학년 졸업반 때 OB에 입단하기로 했지만 앞날은 모르지 않습니까. 프로에 들어갔다가 1~2년 만에 야구를 그만둘 수도 있고…. 사범대라 정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졸업 논문이 필요했습니다. 어쨌든 신인이 프로 첫 훈련에 참가했다가 며칠 만에 논문 쓰러 학교에 간다고 하니 감독님도 황당했겠죠. 마무리훈련 중에 학교에 논문 쓰러 간 동기는 저밖에 없었습니다(웃음).”


 뚱뚱한 몸매에 독특한 투구폼도 김성근 감독의 성에 차지 않았다. 정통파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故) 이종남 기자는 윤석환의 이런 투구폼을 두고 ‘비둘기 모이 주듯 짧게 그리는 왼팔 스윙’이라고 묘사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경에 거슬리는 투구폼은 뜯어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김성근 감독.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마무리훈련에 이어 스프링캠프에서도 몇 차례 “이렇게 던져봐”, “저렇게 해봐”라면서 투구폼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윤석환은 시늉만 몇 번 해보다 “저는 종전 폼이 맞는 것 같습니다”라며 다시 원래의 자기 폼으로 돌아가 공을 던졌다.


 포기를 한 것일까, 눈 밖에 난 것일까. 김 감독은 어느 순간부터 윤석환 투구폼에 대해서는 크게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윤석환의 특이한 투구폼이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한 김경문 포수와 조범현 포수도 투구폼을 유지하도록 거들었다. 김 감독이 여기저기 시찰을 하다 윤석환을 보러 오는 순서가 되면 선배 포수들이 연기(?)를 했다.

OB베어스 포수 김경문 ⓒ두산베어스


 “자, 라스트(last) 5개!”


 김성근 감독이 “몇 개 던졌는데 벌써 라스트냐?”고 물으면 “100개 던졌습니다”라고 둘러댔다. 그러면 김 감독도 투구폼에 대해 품평회를 하지 않고 그냥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했다.


 사실 당시 김 감독의 시야에 우선순위로 들어온 신인 투수는 따로 있었다. 김진욱과 한오종이었다.


 김진욱이야 중학교(춘천중) 시절부터 전국 스카우트들 사이에 이름을 알린 유망주. 고교(천안북일고)에서는 1979년 제9회 봉황대기 감투상을 받았고, 대학(동아대)에서는 1983년 대통령기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강속구 사이드암 투수로 꾸준히 주목을 받아왔다.


 동대문상고와 한양대를 나온 한오종은 특별한 이력은 없었지만 빼어난 하드웨어로 김 감독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키가 190㎝에 육박하는 거구에 힘도 좋았다. 잠재력이 커 보였다. 김 감독은 한오종을 비밀병기로 만들기 위해 스프링캠프 때까지 투구폼을 만지는 데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한오종은 1984년 1군 마운드에 서지 못했고, 1991년 쌍방울에서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통산 35경기에 등판해 4승6패를 기록한 뒤 은퇴했다.


김진욱과 한오종 ⓒ두산베어스



● 독특한 투구폼 그리고 직진 인생


 올드팬이라면 윤석환의 독특한 투구폼이 어렴풋이 기억날 것이다. 특별한 변화구도 없이 직구만으로 타자와 맞서 나가는 직진 인생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윤석환은 자신의 독특한 팔스윙을 두고 “요즘 선수로 보면 노경은(롯데)과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컨트롤과 변화구 위주 피칭이었는데 프로 들어오고 나서 이상하게 변화구가 말을 듣지 않았어요. 예전에 그렇게 잘 던졌던 커브가 백스톱에 꽂히고 그랬어요. 속으로 ‘변화구 안 좋아? 그럼 직구만 던지지 뭐’라고 생각했죠. 남들은 내 공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난 달랐어요. 거짓말 좀 보태면 내 직구가 대학 시절보다 4~5배 빨라진 것 같았어요. 컨디션 좋은 날엔 공도 타자 앞에서 정말 살아 오르는 느낌이었고. 직구로 코스만 몸쪽, 바깥쪽으로 구분해 던졌어요. 그렇게 해도 통하니까 더 자신 있게 던졌던 것 같아요. 김경문 선배는 거의 70% 바깥쪽 직구 사인이었죠.”


 왜 이런 투구폼을 갖게 됐을까. 다음은 선린상고 감독 시절 윤석환을 에이스로 만든 뒤 1979년 대통령배 대회 우승을 이끈 원로 야구인 박용진 전 감독의 기억이다.


 “윤석환은 원래 내야수 출신인데 선린상고 2학년 때까지는 체격이 작아 주전으로 나서지 못하고 배팅볼 투수를 했어요. 그런데 컨트롤이 기가 막힙디다. 타자들이 원하는 코스로 예쁘게 던져주니까 너도나도 배팅볼 던져달라고 하고. 그때 포지션을 놓고 윤석환에게 ‘뭐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투수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투수로서 배워야 할 기본기 몇 가지를 가르쳐줬는데 빠르게 습득해 에이스가 됐어요. 키가 갑자기 크면서 허리가 아파 오른발 키킹도 짧았고 왼팔스윙이 짧았는데 그게 오히려 나중에 타자들이 타이밍을 맞추기 힘든 장점이 됐죠.”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만 해도 “키가 170㎝만 돼도 소원이 없겠다”고 했던 윤석환은 갑자기 키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3학년 때 181㎝까지 컸다. 공에 힘이 붙으면서 에이스로 도약했다.


 당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부터 천부적 재능을 발휘한 박노준과 김건우가 선린상고 1학년으로 들어와 뒤를 받쳤다. 1979년 대통령배 결승전. 선린상고는 윤학길이 이끈 부산상고를 15-1로 대파하면서 1969년 이후 10년 만에 전국대회를 제패했다. 1969년은 투수 유남호와 ‘쌕쌕이’ 외야수 이해창이 주축이 돼 대통령배, 청룡기, 화랑대기,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며 선린상고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해. 선린상고는 다시 고교 무대의 강자로 도약했고, 윤석환은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5세이브포인트…전문 마무리투수 시대 개척

김성근 감독과 황태환 ⓒ두산베어스

 프로야구 초창기엔 투수의 역할 분담이 불명확했다. 에이스가 선발과 마무리를 도맡는 팀도 많았고, 오늘 선발등판 후 내일 불펜에서 던지는 투수 기용법이 어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2003년까지 구원왕은 세이브포인트(구원승+세이브)로 가렸을 만큼, 마무리투수라고 해도 1이닝 세이브는 드물었다. 구원승과 세이브가 같은 평가를 받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초창기 투수들의 세이브 숫자는 극히 적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구원왕은 19세이브포인트(11세이브+8구원승)를 거둔 삼성 황규봉. 팀당 80경기를 치렀던 1982년에 황규봉은 무려 47경기에 등판했는데 그중 선발등판 16경기에 8차례 완투가 곁들여져 있었다.


 한 시즌 100경기로 확대된 1983년 구원왕은 OB 황태환으로, 20세이브포인트(14세이브+6구원승)를 기록했다.


 그런데 1984년 윤석환이 혜성처럼 나타나 KBO리그 구원투수의 역사에 혁명을 일으켰다. 김성근 감독 눈밖에 있던 윤석환은 시간이 지날수록 김 감독의 시야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연습경기와 시범경기를 치르면서 구위와 배짱, 수비능력과 견제능력을 확인하고는 OB 뒷문을 책임지는 전문 마무리투수로 낙점하기에 이르렀다.


 윤석환은 개막전 세이브를 시작으로 연일 세이브 숫자를 쌓아나갔다. 다음날 선발로 내정된 선배 투수는 윤석환에게 “오늘 등판하지 말고 쉬라”며 은근히 압력(?)을 넣기도 했다. 자신의 승리를 마무리해 달라는 뜻이었다. 박상열이 대표적인 투수였다. 유난히 윤석환과 궁합이 잘 맞았다. 박상열은 윤석환의 뒷받침 속에 그해 커리어 하이인 12승을 거뒀다.


 후기리그 초반인 7월 13일 대전 해태전에서 윤석환은 마침내 시즌 15세이브를 달성했다. 팀 선배 황태환이 전년도에 작성한 기록을 넘어 KBO리그 한 시즌 최다 세이브 신기록을 작성하는 순간이었다.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세이브가 뭔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기록인지도 잘 몰랐어요. 세이브가 그렇게 재밌지도 않았고요. 매일 뒤에서 대기를 해야 하니 그냥 힘들다는 생각뿐이었죠. 같이 신인으로 들어온 김진욱은 선발로 등판해 승리도 챙기고, 한 번 던지고 나면 며칠 쉬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또 하나 마무리투수가 재미없었던 게 TV 중계를 하면 항상 저는 방송에서 잘렸던 거였어요. 경기 후반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마칩니다'라면서 제가 등판하면 방송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김성근 감독님한테 '나도 선발시켜달라'라고 떼를 쓰기도 했죠.”


윤석환 ⓒ두산베어스


 당시엔 스포츠 전문 TV 채널이 없었다. 지상파 방송에서 프로야구를 중계하다 보니 일정한 시간이 되면 다음 시간에 예정돼 있던 프로그램 방송을 위해 경기 후반 중계가 잘리는 게 태반이었다. 때론 1점차 승부인데 9회말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캐스터가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마칩니다”라는 코멘트를 하고 중계를 끝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세이브에 별 감흥이 없었던 윤석환은 언제부터 세이브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을까.


 “16세이브 신기록을 작성했을 때였어요. 당시 유일한 스포츠신문이던 일간스포츠 1면에 제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리더라고요. 16세이브, 17세이브, 20세이브…. 세이브를 할 때마다 신기록이라고 계속 대서특필되니 그때부터 세이브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7월에 이미 KBO리그 한 시즌 최다 세이브 신기록을 달성한 윤석환은 20세이브 고지를 넘어 그해 25세이브를 기록하게 된다. 여기에 10구원승이 추가돼 35세이브포인트를 쌓았다. 비교될 투수조차 없는 단독 1위였다.


 그해 구원 2위는 롯데 최동원. 24세이브포인트(18구원승+6세이브)로 11포인트나 차이가 났다. 최동원은 1984년 27승으로 다승 1위와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는데, 롯데 강병철 감독은 바람잡이 선발을 투입한 뒤 3회나 4회, 5회라도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최동원을 구원 투입해 승리를 마무리하는 작전을 많이 펼쳤다. 그 결과 18구원승이 만들어졌다. 그해 최동원은 팀의 100경기 중 51경기에 등판해 284.2이닝을 소화했다. 엄밀히 말해 세이브 전문 투수가 아니었다.


 구원 3위는 1983년 20승을 올리며 해태 우승을 이끌었던 이상윤으로 1984년 14세이브포인트(6구원승+8세이브)를 기록했다. 이상윤 역시 전문 세이브 투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과 비교했을 때, 윤석환은 당시 KBO리그에서 유일하면서도 독보적인 전문 소방수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윤석환 역시 오늘날처럼 1이닝 전문 세이브 투수는 아니었다. 2이닝 세이브는 물론 3이닝 세이브도 수없이 따냈다. 윤석환은 그해 57경기(선발 4경기 포함)에 등판했는데 무려 146이닝이나 던졌다. 규정이닝(100이닝) 훨씬 넘어서는 투구였다. KBO 최초 전문 마무리투수라는 영역을 개척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의 전문 클로저와는 개념이 달랐다.


 1984년 윤석환은 선발 2승을 포함해 시즌 12승8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84를 기록했다. 신인 중에서는 비교 대상조차 없는 압도적 성적이었다. 1984년 신인왕은 일찌감치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최초 만장일치 신인왕-최초 투수 신인왕-OB 2년 연속 신인왕

시상식장의 윤석환 ⓒ두산베어스


 요즘은 정규시즌 종료 직후 MVP와 신인왕과 관련해 전자투표를 실시한다. 그리고는 한국시리즈 종료 후 별도의 시상식 날짜를 정해 투표 결과를 개봉한다.


 그러나 초창기엔 한국시리즈 최종전이 벌어지는 날에 정규시즌 MVP와 신인왕, 한국시리즈 MVP 투표를 한꺼번에 실시했다. 당시엔 요즘과 달리 언론사도 적었고, 투표인단인 야구기자들도 몇 명 없었다. KBO가 마련한 용지에 이름을 써넣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투표를 하다 보니 프로야구 취재기자들이 한국시리즈 취재차 야구장에 모였을 때 한꺼번에 투표를 했던 것이다. 투표 결과 또한 당일 한국시리즈 우승팀 시상식 직후 함께 발표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84년 한국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였다. 10월 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롯데가 6-4로 승리하면서 시리즈 전적 4승3패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정규시즌 때 27승을 거둔 롯데 최동원은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올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날 3-4로 뒤진 8회초 유두열의 극적인 3점홈런이 터지면서 스코어가 6-4로 뒤집히자 잠실구장 기자실은 난리가 났다. 삼성 우승 쪽으로 기사를 쓰다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기사를 다시 작성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원고를 마감해야 할 시간에 부리나케 MVP와 신인왕 투표까지 진행되자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한국시리즈가 롯데 우승으로 마무리되면서 한국시리즈 MVP는 역전 홈런을 친 유두열에게 돌아갔고, 정규시즌 MVP는 최동원이 차지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시리즈 4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쓴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는 것이 옳은 듯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기자실에서 정신없는 상황에서 투표를 하다 보니 일종의 갈라먹기 투표가 된 것이었다. “유두열의 역전 홈런이 없었으면 롯데 우승이나 최동원 4승도 없다”는 목소리에 한국시리즈 MVP는 유두열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오히려 신인왕 투표는 별 이슈 거리가 되지 않았다. 대적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의 경향신문 기사에서 봤듯이, 윤석환은 신인왕 투표에서 ‘KBO리그 최초 만장일치 신인왕’이 됐다. 당시엔 점수제로 신인왕과 MVP를 가렸는데 윤석환은 1위표 11표를 모두 휩쓸었다. 110점 만점에 110점을 얻었다. 2위는 MBC 김상훈(12점), 3위는 롯데 조성옥(5점)으로 큰 격차가 났다.


 지금까지 KBO 역사상 만장일치 신인왕은 1984년 윤석환과 1996년 박재홍 단 2명뿐이다(1996년부터는 점수제가 아닌 득표제를 시행했는데, 박재홍은 1996년 유효표 65표를 싹쓸이해 역대 2번째 만장일치 신인왕이 됐다).


 생애 단 한 번밖에 없는 신인왕 기회에, 그것도 만장일치로 선정된 기분은 어땠을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윤석환은 오히려 “무덤덤했다”며 웃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무용담을 늘어놓듯 에피소드 보따리를 풀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삼성이 6차전에서 이겨서 우승팀이 결정됐다면 그날 시상식이 열렸을 텐데, 롯데가 6차전을 잡으면서 그냥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7차전에 또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양복 입고 또 잠실구장으로 갔죠. 7차전에서 롯데가 8회에 유두열 선배 홈런으로 극적인 역전 우승을 하면서 난리가 났고, 저는 뭐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됐죠.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정규시즌 MVP 최동원 선배, 한국시리즈 MVP 유두열 선배에게 맞춰졌어요. 저한테 ‘인터뷰하자’는 기자 한 분 없더라고요. 그냥 트로피 들고 기념사진 한 장만 찍고 잠실구장에서 나왔죠. 다음날 신문을 봐도 제 기사는 하나도 없고, 남은 건 그 기념사진 하나예요.”


 박빙의 승부를 펼친 경쟁자가 있었다면 어쩌면 수상의 기쁨이 더 컸을지 모른다. 언론도 흥미롭게 경쟁관계를 지켜보며 1984년 신인왕을 크게 다뤘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 봐도 뻔한 신인왕 싸움에 오히려 찬밥 신세가 됐던 것이다.


 “당시 승용차도 귀하던 시절이었잖아요. 신인이 차가 어딨습니까. 버스를 탔죠. 트로피 하나 가슴에 품고 버스 타고 둔촌동 집까지 가는데 쓸쓸하더라고요. 요즘은 따로 MVP, 신인왕 시상식을 하니까 좋잖아요. 그땐 완전히 한국시리즈에 묻혔어요. 경쟁자도 없는 만장일치 신인왕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저도 긴장감도 없었고 무덤덤했던 것 같아요. 역설적으로 슬픈 신인왕이었죠. 지금 다시 생각하니 웃기네요. 하하.”


 그러나 그의 신인왕 등극은 역사적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우선 프로야구 초창기 최초의 역사를 써나가던 OB는 윤석환 신인왕 배출로 또다시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냈다. 1983년 외야수 박종훈을 KBO리그 최초 신인왕에 내놓은 데 이어 최초로 2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한 구단이 됐다. 아울러 윤석환은 KBO 역사에 투수 최초, 구원투수 최초, 좌완 최초 신인왕에 오르는 이정표를 남겼다.



● 강렬했지만 짧게 빛났던 불꽃, 윤석환을 기억하는 이유

윤석환의 투구 모습 ⓒ두산베어스


 윤석환은 그해 11월, 태릉선수촌에서 실시한 체력 테스트를 하다 허리를 다치면서 선수 생활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왕복 달리기를 할 때 좌우 바닥에 놓인 나무를 집어 들고 턴을 해야 하는데, 나무를 드는 순간 허리를 삐끗한 것. 태릉선수촌이면 과학적 훈련과 테스트 기법이 발달해 구단 차원에서 추진한 일이었지만, 체력이 고갈된 시즌 후에 실시한 체력 테스트는 오히려 독이 됐던 셈이다. 결국 시즌 후 체력 테스트는 윤석환의 부상 이후 OB 구단에서 사라졌다.


 윤석환은 그래도 부상 후유증을 털고 이듬해인 1985년에도 맹활약했다. 41경기(110.1이닝)에 등판해 5승1패6세이브, 평균자책점 3.34를 기록했다. 전년보다 떨어진 성적표였지만 규정이닝(110이닝)을 채웠다. 여기에 승률 0.833으로 승률왕에 올랐다.


 이로 인해 KBO 시상 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5승1패의 윤석환과 25승5패의 삼성 김시진이 공동 승률왕에 오르자, 이듬해부터 승률왕 요건을 바꾼 것. '규정이닝' 외에 '10승 이상'이라는 조건이 붙게 됐다. 자칫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1승 무패나 2승 무패를 기록하더라도 100% 승률로 승률왕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승률왕 규정에 손질을 가했다(1999년부터는 승률왕 조건이 또 한 번 개정됐는데 ‘규정이닝’을 제외하면서 ‘10승 이상’의 조건만 충족하는 쪽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윤석환은 1986년과 1987년 여기저기 크고 작은 부상 속에 부진에 빠졌다. 그리고는 김성근 감독의 OB 사령탑 마지막 시즌인 1988년 불꽃처럼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40경기에 등판해 13승3패 14세이브, 평균자책점 2.08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1984년 이후 4년 만에 구원왕(27세이브포인트)에 복귀했고, 규정이닝(108이닝)을 채우면서 구원승으로만 13승을 거둬 단독 승률왕(0.813)에 올라 2관왕을 차지했다. 평균자책점(2.08)은 해태 선동열(1.21)에 이어 2위에 랭크됐다. 잊혀 가던 이름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윤석환 ⓒ두산베어스


 그러나 윤석환은 이후 어깨 통증과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담증세로 고전했다. 다시 영광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1990년 12월 조범현과 함께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된 뒤 1991시즌을 끝으로 선수 유니폼을 벗었다. 프로통산 8시즌 동안 235경기에 등판해 43승27패, 50세이브, 평균자책점 3.44의 성적표를 남겼다.


 강렬했던 불꽃. 그러나 너무 빨리 진 꽃. KBO 최초 전문 마무리투수였던 윤석환은 우리의 기억에 그렇게 남아 있다.


 “여기저기 아프다 보니 열심히 하면 고장이 났어요. 그렇지만 죽도록 해봤으니 후회는 없어요. 프로야구가 없어지지 않는 한 1984년 신인왕 이름은 남아있을 거잖아요. 또 그렇기 때문에 재조명을 받으면서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거고요.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어릴 때 대단한 걸 했구나’ 싶기도 하네요.”


 윤석환 이후 KBO리그 마무리투수 신인왕 계보를 보면 1991년 쌍방울 조규제-2002년 현대 조용준-2005년 삼성 오승환-2009년 두산 이용찬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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