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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2. 2023

[20] "굿바이" 3년 전 약속과 이별의 대전 블루스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85년 프로야구엔 굵직굵직한 이슈들이 터져 나왔다.


▲고려대를 졸업한 아마추어 최대어 선동열은 해태와 입단 협상 줄다리기를 하다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하는 파동 속에 후반기에 가서야 비로소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가 끝날 무렵 청보에 매각됐다. 그러면서 핀토스라는 이름으로 후기리그부터 출발한 청보는 야구해설가 허구연(현 KBO 총재)을 감독으로 깜짝 선임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해태 루키 이순철은 20연속경기안타로 KBO리그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OB 베어스가 2년 연속 독식하던 신인왕 계보에 타 팀 선수로는 처음 이름을 올렸다.


▲삼성은 전·후기리그 통합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프로야구 역사상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었다.


▲OB 베어스가 3년간의 대전 생활을 마감하고 마침내 서울에 입성한 것.


 이는 베어스 역사뿐만 아니라 KBO리그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서울 한 도시에 MBC 청룡과 OB 베어스 2개 팀이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베팬알백] 20번째 주제는 베어스가 1984년을 끝으로 대전을 떠나 1985년부터 프랜차이즈를 서울로 바꾸게 된 과정이다.


OB베어스 창단식 ⓒ두산베어스

3년 전의 약속


 OB 베어스가 원년에 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전으로 내려가야만 했고, 3년 후 서울에 입성하기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베팬알백] <1편>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8267e16f6a6747d/1


 다시 한번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두산그룹은 원년 멤버로 충청권을 기반으로 출발했지만 사실 대전이나 충청도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이 서울 종로4가에서 시작했다는 점에서 두산은 프로야구 창설 당시 서울 연고를 요구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프로야구 붐을 일으키기 위해 MBC를 서울 연고팀으로 낙점한 상황이라 두산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프랜차이즈가 하나둘씩 정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미 롯데 자이언츠라는 이름으로 실업야구단을 창단해 운영하고 있던 롯데그룹은 신격호 회장의 고향(울산)이 있는 부산·경남 지역을 연고로 해서 프로야구단으로 전환하는 데 동의했다. 삼성그룹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시작한 대구·경북을 맡기로 했다. 광주와 호남 지역은 삼양사가 프로야구단 창단에 난색을 표하는 등 어지러운 상황 속에 결국 해태가 책임지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지역 창단 작업이 난관에 봉착했다. 충청권 후보였던 한국화약(한화)은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이 1981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프로야구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인천과 경기도·강원도 광역 연고권에는 현대그룹이 유력 후보로 꼽혔지만 정주영 회장이 88서울올림픽 유치원장을 맡으면서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전념하겠다”며 프로야구단 창단을 포기했다.


 프로야구 준비 소식을 뒤늦게 접한 두산그룹은 적극적으로 창단 의사를 밝혔고, 프로야구를 설계하고 있던 이용일(KBO 초대 사무총장) 씨는 대전의 적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충청권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두산은 인천이 공석이 되자 “대전보다는 차라리 인천으로 가겠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용일 씨가 두산 측에 “두산이 대전을 맡지 않으면 대전에 또다시 새로운 기업을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며 두 가지 약속을 했다. ▲3년 후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해 주고 ▲서울의 선수 자원에서 MBC와 2대1로 배분하게 해 준다(당시 충청권 지역 팜은 열악해 선수가 부족했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여기에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청와대 이학봉 민정수석이 두산 측에 강온 양면 작전을 썼다. “일단 프로야구를 조직해야 할 것 아니냐. 3년 뒤에는 서울로 올라올 수 있도록 내가 책임지고 해 줄 테니까 대전으로 가라”고 지시한 것. 결국 두산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전으로 내려가 OB 베어스를 창단하면서 원년 멤버가 됐던 것이었다.


 인천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돼 프로야구는 비로소 6개 구단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산은 구두상의 약속만 믿을 수 없었다. 결국 ‘3년 후 서울 이전’이라는 내용의 문서에 다른 5개 구단 구단주들의 사인과 법률사무소 공증까지 받은 뒤 대전에 둥지를 틀었던 것이다.


1982년 창단 후 대전 시내에 걸린 환영 현수막 ⓒ두산베어스
1982년 대전 한국시리즈 우승 퍼레이드 ⓒ두산베어스


●떠나는 대전…제7구단 빙그레 이글스 창단


『OB가 1984시즌을 끝으로 대전을 떠나 서울로 프랜차이즈를 옮김에 따라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는 호서 지역에 새로운 연고팀을 물색하는 작업이 1984년 초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대전 지방에서는 구단 창설의 당위성이 선거전의 쟁점으로까지 비화, 정부 측에 야구단 창설을 건의하기 위한 가두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야구사 1214페이지>


 OB가 대전을 떠나기로 한 것은 이미 3년 전 약속된 일이었지만, 1984년이 되자 내내 화두에 올랐다. 원년 우승 팀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OB가 대전을 떠나는 일은 야구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뜨거운 관심사였다. 뒤집어 놓고 보면 그만큼 프로야구는 짧은 시간 안에 국민의 삶 속에 파고들면서 최고 인기 스포츠로 완전히 정착했다는 의미였다.


 당시 대전은 직할시(현재 광역시)가 아닌 충청남도 내에 있는 도청소재지였다. 충남도지사는 연일 들끓어 오르는 지역민들의 프로야구단 창단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체육부에 “제7구단을 조속히 창설해 달라”라고 건의를 했고, 체육부는 10월 29일 KBO에 이 같은 문제에 대해 회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을 연고로 하는 제7구단 창단 우선권을 쥔 기업은 한국화약. 사실 한국화약그룹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이 1981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한화가 먼저 충청권을 연고로 원년 멤버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김종희 회장은 천안북일고 야구부를 창설하는 등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인물이었다. 미국 유학 도중 부랴부랴 귀국해 29세에 한화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은 김승연 회장은 프로야구 출범 당시엔 경황이 없었지만 선친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역시 야구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프로야구단 창단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한화그룹은 프로야구 출범을 함께 하지 못한 점을 애석해하면서 1983년에 이미 창단 신청서를 KBO에 제출해 둔 상태였다. OB가 대전을 떠나면 언제든 그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 5개 구단이 제시한 가입금 30억 원이 문제였다. 당시 30억 원은 기존 6개 구단들이 3년에 걸쳐 입은 적자만큼 신생 구단도 출혈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그동안 KBO리그가 벌어놓은 홍보효과를 대략적으로 환산한 금액이었다.


 한화그룹은 “팀의 모양새를 갖추는 데에 120억 원을 들여야 하는 판국에 별도의 가입금 30억 원을 내라는 것은 횡포”라며 KBO와 다른 6개 구단에 “가입비 30억 원을 재고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야쿠르트와 동아건설 등이 제7구단 창단 라이벌 기업으로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화그룹은 결국 30억 원을 현금으로 내는 대신 서울 강남구 양재대로에 있는 현 KBO 건물 '야구회관'을 건립해 기증하는 조건으로 제7구단 빙그레 이글스를 창단했다. 1985년에 곧바로 1군 리그에 뛰어들기에는 시일이 촉박한 데에다 선수 수급에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1986시즌부터 1군 페넌트레이스에 참가하기로 했다.



●대전 프랜차이즈 고별전

대전 고별전 선발투수로 나선 계형철 ⓒ두산베어스


 1984년 9월 16일. OB 베어스가 대전 연고팀 자격으로 대전구장에서 마지막 경기를 한 날이다. 일요일 낮경기로 치러진 홈 고별전. 상대는 롯데 자이언츠였다. 후기리그 우승을 놓고 막바지 치열한 순위 싸움을 하고 있는 상대여서 모든 이들의 관심이 대전에 집중됐다.


 이날 경기 전까지 롯데는 24승1무19패로 후기리그 1위에 올라 있었고, OB는 24승1무20패를 기록해 0.5게임차로 맹추격 중이었다. OB가 롯데에 승리를 거둔다면 후기리그 4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1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OB는 구단 역사의 갈피 속에 추억으로 남을 대전 고별전에서 롯데에 1-5로 패하고 말았다.


 OB 김성근 감독은 그해 에이스로 성장한 계형철(시즌 14승4패, 평균자책점 2.06)을 선발투수로 낙점하며 순위 뒤집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시작하자마자 계산이 어긋났다. 1회초 1사 1루에서 롯데 3번타자인 재일교포 강타자 홍문종에게 우월 2점홈런을 헌납한 것. 3회초에도 1사 2루서 홍문종에게 중전 적시타를 맞았다. 이어 홍문종의 2루 도루 시도 때 포수 송구실책이 겹치며 1사 3루. 여기서 4번타자 김용철에게 중전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0-4로 끌려갔다. 투수는 신인 최일언으로 교체됐다.


 OB는 3회말 반격에 나섰다. 롯데 선발투수 배경환을 상대로 선두타자 조범현과 이홍범의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 황금 기회를 잡았다. 그러자 롯데는 배경환을 내리고 좌완 안창완을 투입했다. 1번타자 윤동균의 유격수 플라이로 1사 1·2루. 이어 김광수의 타구는 롯데 3루수 김용희 앞으로 갔고, 더블플레이를 시도하는 사이 2루수 박영태의 1루 악송구가 나오면서 OB는 1점을 만회했다.


 롯데 강병철 감독은 그해 투수 운용 패턴대로 리드를 잡자 철완 최동원을 4회말부터 구원 투입했다. 최동원은 1984년 페넌트레이스에서 27승을 올리고, 한국시리즈에서도 4승을 거두는 괴력을 발휘했는데, 정규시즌 27승 중 18승이 구원승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오프너를 먼저 투입했다가 승기를 잡으면 경기 초반이라도 최동원 카드를 꺼내 경기를 마무리하는 전법을 썼다. 그만큼 이날 경기는 OB와 롯데에게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의 향방이 걸린 중요한 승부였다.


 OB는 5회초 2사 3루서 김용철에게 좌전 적시타를 맞으면서 1-5로 뒤졌고, 9회까지 6이닝을 책임진 최동원을 상대로 3안타만 뽑아낸 채 무득점에 그쳐 패배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8회초 2사 3루에서 등판한 황태환이 9회초까지 1.1이닝 무실점으로 막았다. 대전 마지막 경기 마지막 투수가 됐다. 그리고 9회말 4번타자 양세종(좌익수 플라이)~5번타자 박종훈(투수 땅볼)~6번타자 이근식(좌익수 플라이)의 타격으로 대전 고별전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대전 홈경기 중 마운드에 모인 선수단 ⓒ두산베어스
1984년 대전 고별전 경기기록 ⓒ한국야구위원회 KBO 연감


 이날 패패는 뼈아팠다. 롯데는 남은 5경기 중 4경기를 부산 홈 구덕구장에서 치르고, OB는 홈경기 없이 남은 4경기를 대구, 부산에 이어 제주(해태 2연전)까지 가서 원정으로 소화해야 하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동률이 되면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을 치르게 되지만, 1.5게임차로 뒤지게 된 OB로서는 쉽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OB는 남은 4경기를 모두 이기면서 후기리그 28승1무21패를 기록하긴 했다. 그러나 롯데가 29승1무20패를 기록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권은 롯데에 돌아갔다.


 전기리그에서 삼성에 2게임차로 밀려 2위에 그친 OB는 후기리그에서도 롯데에 1게임차로 2위로 밀려나며 결국 한국시리즈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그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합친 종합 성적에서 가장 높은 승률(0.586, 58승1무41패)을 올리고도 전·후기 우승팀에게만 주어지는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잘 가세요!” “잘 있어요!”…눈물의 대전 블루스

1982년 대전 홈경기 사진 ⓒ두산베어스


 이미 헤어짐을 알고 만났던 사이였다. 떠나는 이들(OB 구단)이나 떠나보내는 이들(대전 팬)이나 예정된 이별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1985년부터 서울로 입성하기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원년부터 서울에 집을 구해 놓고 대전경기를 원정경기처럼 치러왔다. 대전에 경기가 있을 땐 구단이 제공한 호텔 생활을 했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있는 ‘기러기 아빠’들은 1984시즌이 되자 마치 제대를 앞둔 군인들처럼 하루하루 날짜가 지날 때마다 손꼽아 서울로 올라갈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별이 어찌 생각처럼 가벼울 수만 있을까.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자 모두들 만감이 교차했다. 3년이라는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선수들도 팬들도 알게 모르게 정이 들 대로 들었던 것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식에서 선수 대표로 선서를 했던 윤동균은 1984년 대전 홈 고별전에 대해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경기를 마치고 대전 팬들 앞에서 모두 도열해 인사를 했던 게 기억난다”면서 “관중석 팬들 중에서는 ‘배신자’라며 욕을 하기도 했지만 따뜻하게 박수를 쳐주시는 팬들도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윤동균 ⓒ두산베어스


 OB 베어스 창단 때 매니저를 맡았고, 이후 구단 직원으로 베어스의 역사를 꿰고 있는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원년부터 사실 대전 여론은 썩 좋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떠날 팀이 대전에 왔다고 본 거죠. OB가 1982년 원년 우승을 하면서 대전 팬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충청도 사투리로 ‘내후년이면 서울 간다’라며 크게 정을 두지 않으려는 팬들도 많았어요.”


 OB는 1982년 경기당 평균관중 4096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3년 3691명, 1984년 2748명으로 홈경기 관중수가 급감했다.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정을 떼려는 팬들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가까스로 탈꼴찌를 한 1983년엔 성적 부진이 겹쳤다고는 해도 김성근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킨 1984년엔 윤석환 김진욱 최일언 신인 트리오가 기대 이상으로 활약하면서 호성적을 올렸다. 마지막까지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놓고 다퉜다. 그러나 대전 관중수는 정반대의 그래프를 그렸다. 평균관중 2748명은 6개 구단 중 최소. 부산의 롯데(8581명)와 서울의 MBC(8137명)와는 격차가 매우 컸고, 인천의 삼미(3299명)보다 적었다.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걸까. 대전 고별전만큼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OB가 후기리그 역전 우승을 하면 한국시리즈라는 무대가 남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날이 마지막 홈경기. 그래서 OB 선수단과 팬들은 조촐한 이별식을 진행했다.


 구경백 사무총장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홈경기 후에 선수들이 도열해서 인사를 하는데 팬들이 인사를 하는 선수단을 향해 박수를 쳐 주셨어요. 누군가가 ‘OB’를 외치자 모두들 ‘OB! OB! OB!’를 연호하더라고요.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많았고요. 처음엔 선수단만 인사를 했지만, 결국 당시 박용민 단장님을 비롯해 모든 직원들까지 그라운드에 나가 인사를 했습니다. 팬들은 ‘잘 가라’, ‘너희 잊지 않는다’며 응원을 해주셨어요.”


 OB 베어스 초대 단장으로 구단의 기틀을 잡은 박용민 전 사장 역시 아련한 추억을 끄집어냈다.


 “대전을 연고로 창단했을 땐 두산그룹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떠밀려 간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어요. 저 역시도 대전과 아무런 연고도 없었고요. 그런데 3년이라는 세월 동안 팬들과 정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초창기 대전구장은 외야석이 풀밭 언덕이었죠.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 술 한 잔 하거나 고기 구워 드시는 팬들도 많았고요. 저도 당시엔 팬들 목소리도 듣고 싶기도 해서 가능한 외야에서 야구를 봤어요. 항상 그곳에서 야구를 보시는 골수팬도 많았는데, 제가 지나가면 꼭 술을 한 잔씩 권해 거기서 취하고 그랬죠. 그런데 대전 홈 고별전을 하고 그라운드에서 인사를 하는데, 술 한 잔씩 권하던 낯익은 그분들이 그물 뒤 관중석에서 ‘잘 가라’고 응원을 하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많이 섭섭했습니다.”


대전구장에서 응원하고 있는 OB 베어스 팬들 ⓒ두산베어스


 OB 베어스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대전 프랜차이즈 팀으로 총 280경기를 소화했다. 158번의 승리와 120번의 패배, 2번의 무승부(승률 0.568)를 기록했다. 원년 우승팀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1982년 MVP(박철순) 배출, 1983~1984년 2년 연속 신인왕(1983년 박종훈, 1984년 윤석환) 배출 등의 추억을 남긴 채 OB 베어스는 대전을 떠났다.


소매에 충청 패치가 붙어있는 1984년 유니폼 ⓒ두산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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