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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2. 2023

[21] 1985년 OB 베어스 우여곡절 서울 입성기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85년. OB 베어스가 프랜차이즈를 서울로 옮긴 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간의 대전 생활. 그동안 응원해준 대전 팬들을 뒤로하고 서울로 떠나는 심경은 자못 복잡했다.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 모른다.


 프로야구 출범 3년 후 OB의 서울 입성은 KBO와 6개 구단의 약속이었고, OB로선 이제 임시 거처였던 대전을 떠나 최고의 시장인 서울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릴 것인가가 중요해진 시점이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를 옮긴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예상했거나 혹은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난관에 부딪쳐야만 했다.


 [베팬알백] 21번째 주제는 1985년 OB 베어스의 험난했던 서울 입성기 이야기다. OB 베어스는 어떻게 서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동대문야구장에 먼저 둥지를 튼 뒤 이듬해인 1986년부터 MBC와 함께 잠실야구장을 사용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OB와 해태의 경기가 열린 동대문야구장 ⓒ두산베어스


1985년 홈구장 동대문야구장 사용 결정


 우선 홈구장 문제가 가장 큰 이슈였다. 삶의 터전이 될 집부터 마련해 놓고 서울로 이사를 가야했지만, 프로야구 기구인 KBO와 아마추어 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 그리고 서울시는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했다. OB가 서울에 입성하면 사용할 수 있는 야구장은 잠실야구장과 동대문야구장. 그러나 꼬인 실타래는 풀리지 않은 채 시계바늘만 돌아갔다.


 서울 프랜차이즈는 MBC 청룡이 선점해 3년간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어 OB로선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만만찮았다. 지금은 ‘한 지붕 두 가족’처럼 평화롭게 잠실구장을 함께 사용하고 있지만, 베어스가 처음 서울에 입성할 때만 해도 잠실구장은 MBC 구단이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홈구장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잠실구장은 건설 중이어서 MBC는 동대문야구장에서 역사적인 개막전(3월 27일 삼성전)을 치른 뒤 이곳을 우선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잠실야구장은 1980년 4월에 착공한 뒤 2년 3개월 만인 1982년 7월 15일에 준공식을 했다. 잠실야구장을 먼저 사용한 쪽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7월 16~17일 이틀에 걸쳐 특별 이벤트로 우수고교 초청경기가 열렸고, 경북고의 류중일(현 LG 트윈스 감독)이 17일 부산고와 결승전에서 6회말 잠실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했다.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 최초 경기가 펼쳐진 것은 그로부터 약 보름 뒤인 8월 1일이었다. MBC가 롯데를 불러들여 첫 홈경기를 치렀고, MBC는 이때부터 동대문 대신 잠실을 안방으로 사용하게 됐다.


 초창기엔 다른 팀이 특별 이벤트로 잠실에서 홈경기를 치른 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OB 박철순의 22연승 행진이 멈추게 된 1982년 9월 22일 잠실 OB-롯데전이 대표적이다. 간혹 이 경기를 OB의 홈경기로 기억하거나 추론하는 팬들도 있지만, 이날 경기는 부산을 프랜차이즈로 하는 롯데가 서울 팬들을 위해 특별 홈경기로 소화한 것이었다. 원년에는 이런 일들이 많았다. 인천야구장 개보수 관계로 삼미가 부산에서 홈경기를 소화하기도 했다.


 어쨌든 OB가 서울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은 잠실야구장 아니면 동대문야구장이었지만, 당시 잠실로 입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MBC의 텃새도 텃새지만 잠실종합운동장 소유주인 서울시도 1988년 서울올림픽(야구 시범종목) 때 사용해야할 잠실야구장을 두 팀이 번갈아 홈구장으로 사용하면 관리가 쉽지 않아 처음엔 난색을 표했다. 당시엔 구장 관리 요원도 적었고, 구장 관리 기법도 요즘처럼 발달하지 않았다. 두 구단이 시즌 내내 잠실구장을 번갈아 사용한다면 구장 상태가 엉망진창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KBO와 OB는 결국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동대문이라면 OB 구단에게도 입지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나쁠 것은 없었다.


 동대문은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이 출발한 종로4가 바로 옆이었고, 당시로선 교통도 잠실보다는 동대문이 훨씬 편리했다. 유동인구도 많아 관중 유치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동대문구장이야말로 한국야구의 역사를 함께해온 성지이자 상징적 야구장이기도 했다. OB는 1982년에 이 구장에서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인연도 있어 서울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려온 많은 OB 팬들과 정서적으로도 빠르게 유대감을 나눌 수 있었다.


동대문야구장 ⓒ두산베어스


●아마야구계의 반발 우리는 어디서 경기하라고


문제는 동대문야구장은 아마추어 야구의 요람이자 보금자리였다는 점. 여기에 프로와 아마추어 야구계의 해묵은 갈등 양상은 고려대를 졸업하는 최대어 투수 선동열의 입단 문제를 놓고 불이 붙었다.


 선동열은 해태와 입단 협상이 풀리지 않자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먼저 입단했다가 1985시즌 개막을 앞두고 해태와 계약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이는 프로-아마 협정 위반과 법정소송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그 불똥은 다시 OB의 동대문구장 사용 문제로 튀었다. 아마추어 야구계의 반발이 극심했다. 1985년 정규시즌 개막을 앞둔 3월 하순까지도 OB의 동대문야구장 사용 여부에 대해 KBO와 대한야구협회가 서로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는 “동대문야구장에서 고교야구, 대학야구, 실업야구 등 연간 180경기나 되는 아마야구 대회 일정을 소화하기도 벅차다. 프로 구단이 동대문구장에 들어와 한 시즌의 절반가량을 홈경기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격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한마디로 “아마추어 야구는 어디에 가서 야구를 해야 하느냐”는 얘기였다.


 그러자 KBO와 OB는 “프로야구를 모두 야간경기로 개최하겠다”며 절충안을 내놓았다. 당시 최인철 대한야구협회장은 결국 염보현 서울시장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OB가 3월 30일과 31일 시즌 개막 경기를 동대문야구장에서 치르는 것을 허용하되, 나머지 OB 홈게임은 잠실구장에서 치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결정을 얻어냈다. 동대문야구장에서 치르는 프로야구는 아마야구 일정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MBC와 OB의 잠실구장 공동 사용에 대해 고려를 하지 않았던 KBO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개막을 앞두고 돌아갈 수도 없어 강공책을 썼다. “동대문야구장에서 아마야구 경기를 소화하느라 프로야구 경기 개시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야간경기로 예정된 일정을 치르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스케줄상 OB가 4월 20일에 첫 야간경기에 돌입할 예정이었지만, 4월 5~10일 서울시고교봄철연맹전 일정과 중복돼 있으니 이 기간 프로야구를 모두 야간경기로 전환하겠다고 양보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되면 1985년 OB의 동대문 홈경기는 모두 야간경기로 소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 당시만 하더라도 프로야구 개막 후 4월 중·하순까지는 낮경기로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KBO는 다시 대한야구협회와 의견조율을 거쳤다. 결국 1985년 정규시즌(전·후기리그 55경기씩 총 110경기) 일정을 짜면서 OB의 홈 55경기 중 43경기만 동대문야구장에서 치르도록 배정했다. 아마추어 야구 대회 일정을 고려해 나머지 12경기는 MBC 홈구장인 잠실구장과 OB가 전년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해온 대전구장에서 소화하도록 하면서 가까스로 개막에 돌입할 수 있었다.


 1985년 OB는 우천순연 등 시즌 도중 여러 변수로 인해 실제로는 홈 55경기 중 동대문구장에서 37경기만 홈경기로 소화했다. 그리고 잠실구장에서 9경기, 대전구장에서 6경기를 치렀다. 여기에 마산구장에서도 홈 3경기를 개최했다.

OB와 MBC의 야간경기가 열린 동대문 야구장 ⓒ두산베어스


 ●훈련은 고교 운동장에서경기는 동대문에서…힘들었던 이중생활


 OB는 프로야구 경기를 소화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동대문야구장을 개보수하는 등 이곳을 보금자리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 투자를 준비했지만, 현실적으로 동대문야구장에서 프로야구를 치르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시즌 내내 아마추어 야구계의 불만과 반발이 계속됐고, 동대문야구장 사용권을 놓고 프로와 아마가 걸핏하면 티격태격했다.


 아마추어 쪽에서는 “낮경기를 하고 있는데 프로 팀이 야간경기를 하기 위해 뒤에 와서 대기를 하고 있으니 마음만 급해진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성격 급한 일부 일선 학교 감독과 아마추어 야구 관계자들은 아마야구 경기가 끝나기 전에는 아예 프로 팀 선수단의 동대문구장 출입을 금지하며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불편한 것은 아마추어뿐만이 아니었다. 프로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마야구가 낮경기로 펼쳐졌지만, 오후에 시작된 경기는 해질 무렵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해프닝도 많이 벌어졌다. 당시 OB 구단 매니저였던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선 가장 큰 것이 훈련 문제였어요. 대학야구 등 아마추어 경기가 진행되고 있으니 오늘날처럼 홈팀이 경기 전 야구장에 도착해도 훈련을 할 수가 없었고, 몸만 풀고 바로 게임에 들어갈 때가 많았어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상상이 되나요? OB는 배명고, 서울고, 경기고, 휘문고 등 서울 시내 고등학교 야구장과 한양대를 비롯한 대학교 야구장을 미리 확보해놓았어요.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사용할 수 있는 야구장을 찾아가서 훈련을 하곤 했죠. 프런트가 구장을 구하지 못하면 감독이나 선수가 인맥을 동원해 구장을 겨우 확보해서 훈련을 한 다음에 동대문야구장으로 이동해 바로 경기를 했으니 선수들 경기력이 제대로 나왔겠냐고요.”


 구 사무총장은 이런 얘기를 하면서 껄껄 웃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엔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훈련 장소 찾는 것이 전쟁이었다. 가뜩이나 훈련량이 많은 OB 김성근 감독은 “이래 가지고 어떻게 연습하냐”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근데, 홈팀인 우리는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았죠. 지방 원정 팀들이 동대문야구장에서 OB와 경기를 하는 날이면 대신 훈련할 야구장을 찾는 게 급선무였어요. 여의치 않으면 훈련도 없이 경기에 돌입해야 했어요.”


학교에서 훈련 중인 OB 선수단 ⓒ두산베어스


 구 사무총장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동대문야구장을 아마추어와 함께 사용하는데, 홈구장이라고 해도 요즘 같이 라커룸이 있었겠습니까. 아마야구가 진행되는 날이면 홈팀이나 원정팀이나 동대문야구장 내에서 휴식할 공간조차 없었죠. 버스에서 쉬거나 신문지 깔고 잠시 누워 있는 선수, 야구장 계단 같은 곳에 앉아서 아마추어 야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선수…. 요즘에 생각하면 ‘프로가 설마?’ 하실지 모르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아마추어 야구 대회 일정으로 인해 OB는 1985년 잠실야구장에서 홈 9경기를 치렀다. 잠실에서 경기 전 훈련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서울시에서 잠실야구장 관리를 한답시고 경기 전에는 잔디도 밟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MBC에게도 마찬가지였다. MBC도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건국대 야구장 등을 사용하면서 잠실구장으로 이동해 경기를 시작하곤 했다. 서울시에서 ‘하라면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당시 선수들이 서울 홈경기 때 고등학교 야구장에서 삼복더위에 훈련을 하고 구단에서 사 온 도시락을 먹었어요. 1980년대인데 고등학교 인근에 요즘처럼 제대로 된 도시락을 만들어 파는 곳이나 있었겠습니까. 삼삼오오 그늘 밑을 찾아가 쭈그리고 앉아서 구단에서 마련해온 도시락 하나 먹고 야구를 했어요.”


 구 사무총장은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이에 대해 선수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OB 포수였던 조범현 전 kt 감독은 “당시 선수들은 그리 큰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생각해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땐 그냥 그렇게 야구하는 줄 알던 시대였다”며 웃었다.


 그라운드 사정도, 휴식 공간도, 훈련 시설도, 오늘날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의 ‘웃픈’ 자화상이다.



 OB 서울 입성 첫해의 기적…홈 관중수 MBC 추월

1982년 어린이 팬들에게 사인해 주고 있는 윤동균 ⓒ두산베어스

 OB로서는 팬 확보가 급선무였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서울 시장을 선점해 이미 고정 팬을 확보해 놓은 MBC와 경쟁을 시작해야한다는 점은 부담이었다.


 MBC 역시 평화롭게 시장을 독점하던 서울 지역에 새로운 팀이 들어오자 긴장을 했고, 고정팬을 붙잡기 위한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MBC는 프로야구단 청룡을 문화방송사 산하의 야구국에 소속시켜 놓은 채 큰 투자를 하지 않았고, 전문 프런트 인력도 없었다(실제로 1990년 LG가 MBC를 인수하면서 프로야구에 뛰어든 뒤에 대대적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OB는 3년 늦게 서울에 왔지만 베어스만의 특화된 팬서비스를 개발해 신규 팬을 창출해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새로운 서울 팬을 확보하는 것도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으로 내다봤다.


 MBC와 OB의 팬 구성방식도 약간은 달랐다. MBC는 원년부터 충성스런 성인 팬들이 많았다. 아빠가 아이들을 야구장에 데려가 가족 팬이 만들어지는 형태로 팬 층이 확장됐다. OB는 반대였다. 원년에 가장 먼저 어린이회원을 모집하면서 서울에 어린이 팬 층이 많았다. OB로선 이들을 공략해 가족 팬을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말하자면 MBC는 ‘톱타운(Top-down·하향식)’, OB는 ‘바텀업(bottom-up·상향식)’ 방식으로 팬 확장이 이뤄진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OB 박용민 단장은 서울 입성을 앞두고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청룡이 3년간 서울에 터를 닦아 왔고, 방송국이라는 거대한 홍보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장(1985년)은 MBC 관중의 60%선만 따라가도 대성공일 것”이라며 “이미 확보돼 있는 프로야구 관중을 나눠먹기보다는 새로운 야구팬을 창조하는 데 힘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OB 구단은 구단 직원들을 내보내 동대문역과 서울운동장 전철역에서 내리고 타는 승객수를 시간대별로 측정하게 하고, 이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묘안을 짜냈다. 야구장 내에 맛깔스러운 도시락을 준비하고, 맥주 판매를 통해 팬들이 야구장에서 3시간 동안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마련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와 협의해 홈경기마다 배트걸을 운영했고, 지정석 관리도 하기 시작했다.


 박용민 단장은 1985년 서울 입성 상황에 대해 기억을 더듬었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부터 일본을 자주 드나들면서 일본프로야구단의 선진 운영 기법을 많이 배워왔어요. 프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 팬서비스라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도 구단 직원과 선수들에게 팬서비스를 특히 많이 강조했죠. 대전에 있을 때도 저는 주로 외야에서 야구를 많이 봤거든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있는 팬들이 주는 소주를 받아 마시면서 팬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동대문 와서도 마찬가지였죠. 경기가 시작되면 주로 외야석을 돌았죠. 그런데 대전구장 외야에서 소주 한 잔씩을 건네던 낯익은 OB 열성팬들이 동대문구장 외야에 보이시더라고요. ‘한번 OB팬은 영원한 OB팬’이라며 기차와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와 응원을 해줬어요. 기존의 충청권 OB 팬들도 그대로 이어지고, 서울에서 새로운 팬도 많이 생겨 고무적이었습니다.”


 실제로 OB는 1985년 서울에 입성한 첫해 홈 관중수에서 MBC를 앞지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박용민 단장은 “첫해에 MBC 관중수의 60%만 따라가도 대성공”이라고 했지만, 그해 OB는 25만2731명(경기당 평균 4595명)을 기록해 24만5209명(평균 4458명)의 MBC에 근소하게 앞서는 관중수를 기록했다.


 OB는 3월 30일 개막전에서 승리하는 등 1985시즌 초반 8경기에서 6승2패를 기록하며 선두로 치고나갔다. 서울 입성 첫해 초반부터 팬들의 관심을 끌어당겼고, 흥행의 불을 지폈다. 훈련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환경 속에서도 전기리그에서 삼성에 밀려 2위(29승1무25패)에 그쳤지만 선전을 펼쳤다. 비록 후기리그에서는 부진했지만 팬들의 눈길을 끌만한 초반 레이스를 통해 서울의 신규 팬 층을 빠르게 늘려나갔다.


 이에 반해 MBC는 전기리그에서 24승31패로 6개 구단 주 5위로 떨어지면서 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전기리그가 끝나가던 6월 17일 어우홍 감독을 퇴진시키면서, 1983년 한국시리즈 패배 후 결별했던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을 1년 반 만에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후기리그에서는 20승1무34패를 기록하며 최하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MBC의 성적 부진이 맞물린 반사이익의 결과라고 해도, OB가 첫해부터 MBC 홈 관중수를 앞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OB로서는 충분히 자축할 만한 성과였다.



 1년 만에 막 내린 동대문 시대…1986년부터 잠실 한 지붕 두 가족

잠실야구장에서 펼쳐진 OB와 MBC의 경기 장면 ⓒ두산베어스


 OB는 1년 만에 동대문야구장과 작별을 한다. 이듬해인 1986년부터 MBC와 잠실야구장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한 지붕 두 가족’ 시대를 열게 됐다.


 MBC는 OB와 잠실구장을 공동으로 나눠 쓰는 방안이 반가울 리 없었다. 당연히 처음엔 반대했다. 서울시로부터 잠실구장 임대가능 기간은 1년에 90일 정도인데, 한 시즌 54경기씩 치러야하는 홈경기(1986년부터 빙그레의 1군리그 참여로 7개 구단 체제가 되면서 팀당 시즌 경기수는 전년도 110경기에서 108경기로 축소)를 모두 잠실구장에 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OB의 동대문야구장 사용 문제는 프로와 아마추어 야구계가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 노선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는 사이, 1985년 시즌 후 대한야구협회가 1986년의 아마추어 야구 대회 일정 계획을 세우면서 KBO 측에 동대문야구장을 독차지하겠다는 뜻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 동대문야구장에서 더 이상 프로와 공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KBO와 6개 구단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갈래 길이었다. 1985시즌처럼 앞으로도 계속 아마추어 야구계와 갈등을 이어가더라도 동대문야구장에서 프로야구를 진행하는 강공책을 쓰느냐, 아니면 동대문야구장을 아마야구 전용구장으로 양보하면서 OB가 잠실로 이전해 MBC와 함께 사용하느냐.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이는 단순히 MBC와 OB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OB와 원정경기를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지방 팀들의 사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동대문야구장에서 불편을 감수하던 다른 구단들의 압력까지 더해지면서 KBO는 1985년 11월 말에 체육부에 공문을 보내 MBC와 OB의 잠실야구장 공동 사용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MBC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잠실구장과 동대문구장을 소유하고 있던 서울시도 처음엔 “잠실구장이 프로의 것도 아니고 아마의 것도 아니다. 동대문구장도 아마의 것도 아니고 프로의 것도 아니다”라는 애매모호한 스탠스를 취했으나, 결국 암묵적으로 프로 2개 팀(MBC와 OB)은 잠실야구장을 사용하고, 동대문야구장은 아마추어 쪽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잠실야구장에서 경기 전 몸을 풀고 있는 OB 선수단 ⓒ두산베어스

 이렇게 OB는 1년 만에 동대문구장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 입성 2년째인 1986년부터 새롭게 잠실야구장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러면서 프로야구도 1986년부터 ‘한 지붕 두 가족’ 시대가 열렸다.


서울의 두 구단이 잠실야구장을 사용하면서 장단점은 공존하고 있다. 40년 전의 설계로 지어진 야구장을 두 구단이 사용하다보니 특히 공간 활용이 어렵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두 구단의 사무실이 들어서 있어 원정 팀을 위한 라커룸 등 휴식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시설 개선을 했지만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시즌 내내 쉼 없이 프로야구가 펼쳐진다는 점은 분명 잠실야구장만의 특화된 장점이기도 하다. MBC 청룡과 OB 베어스의 라이벌 구도는 이후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라이벌 구도로 이어지면서 양 구단은 물론 KBO리그 전체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있다. 양 구단과 양 팀 팬들이 이어오는 라이벌 의식은 프로 스포츠의 발전과 흥행에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7년 관중으로 가득 찬 잠실야구장 ⓒ두산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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