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한 알의 무게

손에 힘을 주고 사는 날들에

by 캔디의 여백

어릴 적 나에게 구슬은 단순한 유리알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 보물 그 자체였다. 내 주머니에는 늘 구슬 몇 알이 들어 있었다. 길을 걷다 문득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면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먼저 닿았고, 나는 그 서늘한 기운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든든해지곤 했다.

구슬은 작았다. 그러나 그 작은 유리알 안에는 이상하게도 푸른 하늘이 들어 있었고, 지나가던 바람이 머물렀으며, 아이 하나가 온종일 뛰놀 수 있는 오후가 통째로 담겨 있었다.

왕십리의 그늘진 골목길에서 나는 구슬을 굴렸다. 손끝에 닿는 유리알은 차갑고도 단단했다. 구슬 안에는 저마다 다른 무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 스며든 것, 소용돌이치는 구름결이 어린 것, 초록 줄이 비단처럼 감기거나 붉은 꽃잎이 중심을 향해 타원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햇빛에 비치면 그 작은 구슬 안에서 빛은 수만 갈래로 부서졌다. 나는 그 빛의 파편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곤 했다. 유리 속에 갇힌 무늬가 꼭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작은 우주 같아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손에 쥔 듯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름은 따로 없었어도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등급이 있었다. 예쁜 구슬, 센 구슬, 그리고 아까워서 차마 판에 내놓지 못하는 구슬. 그 작은 유리알 안에는 아이들만의 질서와 가치가 엄격하게 존재했다. 구슬을 튕기던 손끝에는 기술보다 먼저 순수한 열정이 있었고, 잃고도 다시 시작할 줄 아는 어린 용기가 있었다.

딱지와 계급장(철판을 눌러 무늬를 만든 뒤 딱지처럼 쳐서 뒤집어 먹던 것), 그리고 제일 소중했던 구슬. 그것들이 어린 나의 소유 목록 전부였다. 어른들 눈에는 몇 푼 안 되는 장난감이었겠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자존심이었고 재산이었으며 자랑이었다.

골목 한구석의 흙바닥은 늘 우리의 경기장이었다. 땅을 손가락으로 파서 작은 구멍을 만들고, 거기까지 얼마나 정확하게 구슬을 보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구슬 하나를 튕기기 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숨부터 골랐다. 손등에 힘을 주고 엄지를 당기며 눈을 가늘게 뜬 채 거리를 재는 순간, 그 짧은 찰나만큼은 누구도 아이가 아니었다.

힘이 과하면 구슬은 멀리 벗어났고, 모자라면 구멍 턱에서 멈췄다. 그 미묘한 적당함의 감각을 몸이 익힐 때까지 나는 그늘진 흙바닥을 오래도록 지켰다.

상대의 구슬을 맞히면 세상을 얻은 듯했고, 내 구슬을 빼앗기면 하늘이 무너진 듯 억울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구슬처럼 둥글어서, 토라진 마음도 금방 굴러가 버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지만, 구슬 몇 알과 딱지 몇장이 온 우주보다 컸기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구슬을 함부로 걸지 못했다.

구슬 하나하나가 너무 맑고 아까워서, 그것을 잃는다는 것이 내 안의 빛 한 조각을 잃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크게 따지는 못해도 크게 잃지는 않는 길을 택했다. 그때부터 묘한 일이 벌어졌다.

구슬이 늘어날수록 얻는 기쁨보다 잃는 두려움이 더 커진 것이다.

처음에는 단 한 알만 생겨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가진 것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잃지 않으려 조심스러워졌고, 조심스러워질수록 나는 과감한 승부에서 자꾸만 뒷걸음질 쳤다.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두려울 것도 적지만, 지켜야 할 것이 생기는 순간 삶은 그 무게만큼 무거워진다. 구슬 한 알이 이토록 무거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지금은 골목도, 흙바닥도 사라졌다.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화면을 밀 뿐 구슬을 튕기지 않는다. 세상은 훨씬 편리해졌지만 가끔은 흙먼지를 묻혀가며 쪼그리고 앉아 놀던 그 시간이 그립다. 무릎은 까지고 손톱 밑엔 흙이 들어갔어도, 마음만큼은 구슬 속 무늬처럼 투명했으니까.

나이가 들고, 이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사는 일이 바빠질수록 보물이었던 구슬은 조금씩 내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그 어릴 때는 분명 세상 무엇보다 내게 가장 귀한 보물이었는데.

우리는 구슬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투명한 마음을 조금씩 놓쳐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억 속의 구슬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 작은 유리알들은 여전히 햇빛을 품고 있다.

문득 어떤 오후, 오래된 추억 하나가 손바닥 위에 굴러들어오면 나는 잠시 어린아이가 된다. 그리고 조용히 웃는다. 내 어린 날의 우주는, 사실 구슬 몇 알이면 충분했구나 하고.

지금도 가끔 서랍 구석에서 먼지 묻은 구슬 하나가 굴러 나온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구슬이 아니라, 그 구슬을 보물처럼 쥐고 있던 마음인지도 모른다.

주머니 속 구슬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던 그 맑은 소리가 이제 내게 조용히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지키려 그토록 손에 힘을 주고 있느냐고.”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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