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어도 나가는 사람
배트맨의 싸움은 끝난 적이 없다.
악당을 잡는다. 고담을 구한다. 그리고 다음 날 밤이면 또 다른 악당이 나타난다. 조커는 잡혀도 다시 돌아오고, 고담은 구해져도 다시 무너진다. 끝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밤 나간다. 이겨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왜 다시 나가는가. 그 질문이 자꾸 내 마음을 붙든다. 나도 가끔 그런 밤을 살기 때문이다.
슈퍼맨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빛 속에 서고, 희망을 말하고, 인류를 믿는다. 그의 싸움은 밝고 선명하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원이 위에서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강함으로 세상을 정리하고 감탄을 준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사람을 끝까지 붙드는 것은 감탄보다 버팀이라는 것을.
배트맨은 지하에서 나온다. 어둠 속에서 싸우고,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그는 인간이 선하다고 믿기보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먼저 안다. 그래서 혼자다. 그래서 어둡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배트맨이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희망을 말하는 영웅보다, 희망이 없어도 싸우는 사람이 더 진짜 같다. 날 수 없어도, 총알을 막을 수 없어도, 내일 고담이 또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오늘 밤 다시 나가는 사람. 그가 배트맨이다.
배트맨의 진짜 무기는 장비가 아니다.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나가는 게 아니다. 안 나가면 자기 자신이 먼저 무너질 것을 알기 때문에 나간다. 그의 싸움은 늘 밖에서 벌어지지만, 사실은 안에서 먼저 시작된다.
그 집착은 어디서 왔는가.
여덟 살의 골목이다. 부모를 잃은 그 밤이다. 브루스 웨인은 억만장자가 되었고, 훈련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은 사람이 되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골목에서 울던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매일 밤 배트맨을 밖으로 내보낸다. 상처가 그를 만들었고, 상처가 그를 버티게 한다.
나도 가끔 그런 밤이 있다.
하루는 끝났는데 마음은 끝나지 않는 밤. 불을 꺼도 눈꺼풀 뒤에서 어떤 장면이 계속 돌아가는 밤. 말 한마디를 삼킨 자리, 웃어 넘긴 자리, 못 본 척한 자리들이 늦은 시간에야 몰려와 나를 흔드는 밤. 그때 나는 안다. 오늘 내가 싸운 건 밖의 소음이 아니라 안의 침묵이었구나. 오늘 내가 지킨 건 결과가 아니라 선이었구나. 선 하나를 넘지 않기 위해 하루를 조용히 견딘 날이었구나.
억울하고 속상한 날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에게 오늘도 잘 버텼다고 말해 주곤 했다.
그래서 배트맨이 더 오래 남는다. 그는 땅에서 시작한다. 피곤한 몸을 끌고 다시 나가고, 이겨도 끝나지 않는 밤을 안고 산다.
완벽한 영웅은 감탄을 주지만, 상처 입은 영웅은 우리를 비춘다.
이 세상 살기가 버겁다. 조커는 너무 많고, 우리는 너무 연약하다. 매일 새 악당이 나타나는 것처럼, 매일 새 문제가 터진다. 웃고 넘기려 해도 마음이 먼저 닳는다. 그래서 영웅이 필요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웅이 아니라, 밤을 견디는 영웅. 이길 수 있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먼저 버티는 영웅.
배트맨에게 고담은 구원해야 할 도시가 아니다. 포기할 수 없는 도시다. 사랑해서 남는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없어서 남는 것이다. 그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 모든 슬픔이 들어 있다. 사랑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매일 밤 망토를 입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선택이었다면 그는 훨씬 오래전에 멈췄을 것이다. 그는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남아 있고,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싸우고, 끝낼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한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 떠나지 못하는 자리들. 그것이 반드시 사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 아직 끝내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어서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것을 책임이라 부르기도 하고, 삶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오래전 어느 밤, 우리가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일지도 모른다.
배트맨은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픔은 끝나지 않는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고담이 구해지든 무너지든. 그는 또 나간다.
그게 그를 슬프게 만든다.
그리고 그게 그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든다.
나도 내 밤을 그렇게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