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노스가 무서운 건 힘이 아니다

확신이라는 이름의 폭력

by 캔디의 여백

나의 글 「영웅 2부」에서 인용했던 어벤져스의 악당, 타노스. 그 잔상이 너무나 강렬하여 이야기를 한 번 더 이어가 본다.

사실 나는 타노스에게 잠깐 마음이 갔었다. 악당임에도 그의 서사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고, 목적을 향해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그 압도적인 태도에 잠시 반하기도 했다. 스스로 거대한 짐을 지겠다는 표정,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는 결단.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갈구하는 절대성의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우주의 절반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장면 앞에서 나는 분명히 생각했다. “아, 이건 아니다.” 아무리 명분이 그럴듯해도 사람을 지우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그 찰나의 순간, 타노스는 내게 더 이상 철학적인 악당이 아니었다. 그는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었다.

타노스는 전형적인 악인이 아니다. 그래서 더 큰 문제다.

우리가 아는 악당은 대개 탐욕스럽고 비겁하며 잔인하다. 그런 악의는 얼굴에 써 있고 말투에 묻어 있어 멀리하거나 피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타노스는 다르다. 그는 인류의 절반을 지우면서도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제 손으로 던지면서도 자신의 소명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가 진정 무서운 것은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나는 옳다”라고 믿는 그 단단하고 서늘한 확신이다.

잔인함은 피할 수 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신은 자비의 옷을 입고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다가온다. 우리는 그것이 폭력임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 견고한 논리 안으로 힘없이 빨려 들어가 버리곤 한다.

손가락을 튕기는 찰나 사라지는 것들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으며, 누군가 간절히 기다리는 저녁과 내일이 있다. 그러나 타노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계산만을 본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 계산,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오만한 계산. 그 계산의 끝에서 사람은 희생이 되고, 그 희생은 점차 당연한 비용으로 전락한다.

그 오만한 계산은 우주의 생존을 숫자로 증명하려 했다. 그런데 그 계산에서 지워진 사람들은, 자기 식탁 앞에서 오늘도 혼자 견디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몇 번이나 타노스를 만났다. 보라색 거인의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차가운 회의실에도 있었고 무너진 관계 속에도 있었으며, 때로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도 서 있었다. 그들은 늘 무표정하게 말한다. “어찌할수 없잖아.” “원래 그런 거야.” “결국 이게 맞아.” 그 말들은 칼이 아닌데도 칼보다 깊이 들어온다. 칼은 상처를 남기지만, 그들의 확신은 내가 틀린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나를 무너뜨린다.

확신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은 작아진다. 그저 예민하고 유난스러운 사람처럼 보이다가 결국 혼자가 된다. 확신이 무서운 이유는 그 강도 때문이 아니라, 공감을 완전히 밀어내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단단히 믿는 순간, 상대의 아픔은 뒷전으로 밀린다. 아픔은 감수해야 할 비용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과정이라는 잔혹한 딱지가 붙는다.

나는 이제 흔들림을 나약함으로 보지 않는다. 흔들린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이 내 눈에 보인다는 증거이며, 공감이 먼저라는 마음의 정직한 소리다. 타노스가 끝내 패배한 것은 어벤져스의 힘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확신이 결코 사랑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계산이 늦고 비효율적이지만, 결코 사람을 지우지 않는다. 끝내 사람 곁에 남는다.

여기서부터는 영화가 아니라 내 현실이다.

첫 번째 장면은 회의실이었다.
회의가 길어졌다. 공기가 꺼끌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좀 무리 아닙니까.”
그때 어떤 사람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전체를 위해서야.”
그리고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더 무서웠다.
몇 사람은 입을 다물었고, 몇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 사람은 표정이 굳었다.
그날 회의실에서 사라진 건 의견이 아니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다.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두 번째 장면은 교회였다.
회의가 끝나갈 때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분은 너무 힘들어합니다.”
그때 다른 사람이 단정하게 말했다.
“하나님 뜻이야. 순종해야지.”
그 말이 나오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울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더 말하지 못했다.
그날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입을 닫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나님 이름으로 사람을 눌러버리는 말이었다.

정치는 원래 큰 소리가 난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말이 세진다.
그런데 정치가 무서워지는 순간은 따로 있다.
상대가 틀렸다는 걸 넘어서, 상대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할 때다.
그때부터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 적이 된다.
그때부터 표정이 굳고 말이 칼이 된다.
자기 편은 사람이고, 남의 편은 숫자가 된다.

종교도 원래 옳음을 말한다.
그 옳음이 사람을 살리면 은혜가 된다.
그런데 옳음이 사람을 누르기 시작하면, 그것도 타노스가 된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순종해야지.”
“그래도 감사해야지.”
그 말이 누군가의 입을 닫게 만들고, 울음을 숨기게 만들고, 도움을 못 청하게 만들면, 그것은 옳음이 아니라 폭력이다.

하나님 이름으로 사람을 지우는 순간, 그건 이미 하나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손가락을 튕겨 세상을 정리하는 분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 곁으로 내려와 그 시린 손을 잡는 분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타노스가 되지 않기로 한다. 내가 아무리 옳더라도, 그 옳음으로 누군가를 지우는 순간 나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틀린 길을 걷는 것이다. 정답보다 사람이 먼저고, 계산보다 그들의 얼굴이 먼저다.

타노스는 끝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게 가장 비극이었다

그래서 내가 옳다고 단단해질 때마다, 나는 멈춰 서서 한 번 더 묻는다.
지금, 나는 누구를 지우고 있는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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