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악의 얼굴
최근의 전쟁을 보며 울분을 오래 삼켰다.
그러다 문득 조커가 떠올랐고,
뉴스에서 보던 얼굴들도 함께 떠올랐다.
영화와 뉴스 속 악당들이 한꺼번에 겹쳐 보였다.
영화에서 악당은 결국 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너지고,
잡히고,
사라진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올 때 우리는 조금 후련하다.
정의가 이겼다는 느낌,
세상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런데 극장 문을 열고 나오면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현실의 악당은 여전히 웃고 있다.
더 당당하게,
더 크게.
그래서 나는 자꾸 영화를 본다.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영화에서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현실의 악당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영화 속 악당은 결국 무너진다.
배트맨이 나타나고,
어벤져스가 싸우고,
누군가 끝내 정의를 세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잠깐 숨이 트인다.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이 꼭 유치한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이 상식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군가 나서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현실의 악당은 영화처럼 지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의 자리에 앉는다.
표를 얻고,
지지자를 모으고,
자기 편을 만든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한다.
악당은 늘 자기가 옳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그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상대를 짓밟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더 큰 목적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제일 듣기 싫다.
악당은 단지 잔인한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삶이 무너지는 일을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부르고,
누군가의 죽음을 더 큰 목적을 위한 숫자로 바꾸는 사람이다.
악당은 또 자기 확신을 면죄부로 쓰는 사람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
양심의 제동이 없고, 망설임을 약점으로 여기고,
의심 없는 확신을 정의라고 부른다.
그래서 더 무섭다.
그리고 악당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다.
이 편과 저 편,
쓸모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보호할 사람과 버려도 되는 사람으로 나눈다.
그 순간부터 악은 시작된다.
사람이 얼굴을 잃고,
수단이 되고,
비용이 되고,
제거 가능한 장애물이 된다.
그러니까 악당은 본래부터 뿔 달린 괴물이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기 목적 아래 두는 사람이다.
자기 명분이 너무 커서 남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사람.
그게 현실의 악당이다.
왜 악당은 사라지지 않는가.
악당은 혼자가 아니다.
그 뒤에는 언제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두려워서 따르는 사람들,
진짜로 그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
악당 하나가 무너져도 끝나지 않는다.
그 자리를 또 다른 악당이 채운다.
사람만 바뀌고 구조는 남는다.
악당은 규칙을 어기는 게 아니라,
규칙을 자기 편으로 돌려놓는다.
그래서 같은 잘못을 해도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결말이 다르다.
그게 제일 서럽다.
악당은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도 자란다.
피곤해서 돌아선 사람들,
어차피 달라지지 않는다고 체념한 사람들,
나 하나쯤이야 하고 물러난 사람들.
그 빈자리에서 악당은 더 커진다.
우리가 지치기를,
익숙해지기를,
결국 포기하고 망각하기를 기다린다.
없애지 못하더라도
커지게 두면 안 된다.
드러내야 한다.
기록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악당은 사람들이 잊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기억하는 것이 저항이다.
악당은 늘 멀리 있지 않았다.
요즘 뉴스만 켜도,
그 얼굴은 낯설지 않다.
이제는 영화보다 뉴스에서 더 자주 보인다.
그래서 더 속상하다.
악당이 사라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얼굴에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워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