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탐방기(2)

10개월 동안의 정착

by 연월

<두 번째 병원>

첫 번째 병원에서 안 좋은 기억만 갖고 그만둔지라 병원에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두 번째 병원을 가게 된 건 상담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교 심리센터의 행정조교로 근무 중이었는데, 조교들은 의무적으로 심리검사와 해석상담을 한 번씩 받아야 했다. 그래야 상담 절차와 검사의 종류를 직접 체험해 보고 학생들에게 쉽게 안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형식상 진행한 검사와 해석상담에서 선생님은 우울과 불안지수가 높다며 정기적인 상담을 권유하셨다. 물론 첫 번째 병원에서 이미 우울증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은 나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 학기를 그냥 보냈다. 그동안 근무를 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상담실을 찾고 또 그곳에서 위로받았다며 감사인사를 남기는 것을 보며 상담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시작한 심리상담 2회 차만에 선생님은 내게 약물치료를 제안하셨다. 나는 이전 병원에서의 경험과 진단내용을 핑계로 병원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선생님도 수긍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회기에 선생님은 학생들이 많이 가는 학교 근처 병원을 추려봤다면서 병원 몇 군데의 전화번호와 위치 등을 빼곡히 적은 메모지를 건네주시며 다른 병원도 한번 가보자며 설득하셨다. 결국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목록 중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초진예약을 잡았다. 예약일은 2주 후였다.


이 병원도 분위기는 첫 번째 병원과 비슷했다. 개업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인테리어는 깔끔했고, 아이보리와 베이지 인테리어 덕분에 마음이 편해지는 분위기였다. 학교 앞인 만큼 대기실엔 내 또래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에 했던 것처럼 태블릿 pc로 심리검사를 제출하자 간호사가 초진상담은 30분 이상 걸린다고 미리 언질 해주었다. 이전 병원에서는 상담을 10분도 안 했던지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대기후 상담실로 들어갔다. 예상보다 젊은 선생님이 차분하게 앉아계셨다. 그리고 이전 병원에서 받은 진단과 오게 된 경위, 증상들을 물어보시며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셨다. 덕분에 힘을 얻어 질문에 자세히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가지 정리해 주셨는데, 일단 ADHD는 어린 시절부터 증상이 있어야 하는데 얘기를 들어봐서는 전혀 증상이 없고 상담 중에도 딱히 특별한 증상이 보이지 않아 ADHD는 아닐 확률이 더 크다고 하셨다. 그보다는 우울증의 증상에도 주의력과 집중력 결핍이 있는데 오히려 그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고 하셨다. 뇌파검사는 그냥 보조적인 수단일 뿐 드러나는 증상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이셨다. 그래서 솔직하게 궁금했던 부분을 여쭤봤다.

"우울증이 아니어도 혼자 엄살부리면서 우울증 인척 하면 검사결과도 그렇게 나오는 거 아닌가요? 제가 정말 우울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그냥 원래 멍청하고 게으른 거일 수도 있잖아요"

이에 선생님은

"일단 00씨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증상들이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들이었어요. 어느 정도 지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런 디테일까지 맞추기는 어렵죠. 이렇게 자신을 의심하고 자기 비하를 하는 것도 하나의 증상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직접 말하는 내용 외에도 말하는 태도, 목소리, 표정, 분위기 등 다양한 비언어적 표현도 다 보고 있는데, 제가 지금까지 봤을 때 00씨는 힘든 게 맞아요. 본인을 믿지 못하겠으면 절 믿으세요. 전 여태 이런 걸 구분하고 진단하기 위해 훈련받은 사람이거든요"

라고 답하셨다. 선생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툭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질병처럼 진단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오버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엄살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 아픈 게 맞다고 인정을 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나한테는 그런 수용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우울하기 전 모습은 어땠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나는 매사에 최선을 다했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심리적 여유도 있었고 인간관계도 원만했다. 기억나는 대로 말하자 선생님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이 00씨의 원래 모습이에요. 지금은 그냥 아파서 그런 거예요. 죽고 싶다는 생각도 진심이 아닐 거예요. 단순히 죽으면 안 된다는 윤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설계되어 있고, 항상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요. 죽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일반적인 생물한테는 생길 수 없는 마음이거든요. 지금 느끼는 죽고 싶다는 마음은 진짜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살기 싫다는 마음일 거예요. 잠깐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다 나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요."

라고 말해주셨다. 윤리적인 이유가 아닌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들어주셔서 굉장히 T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일반적인 사람들은 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1차 충격,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부분에서 2차 충격이었다. 다들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사니까 누구나 죽고 싶지만 참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제대로 버텨내지 못하는 내가 나약하고 한심한 거라고 생각했다.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있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치료의 동기가 생겼다. 또한 과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 역시 굉장히 희망적이었다. 무기력해질 때마다 더도 말고 옛날처럼만 하자고 되뇌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생님의 진료를 따라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일이 그렇듯 치료과정은 기대만큼 술술 풀리지 않았다. 이전 병원에서처럼 약물 부작용은 없었지만 치료를 통해 딱히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정신과 약물은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는 말에 거의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치료를 이어갔지만 불안과 우울은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약을 먹기 전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나를 지치게 했다. 점차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미화된 것이고, 나는 원래 이모양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이대로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할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이때가 무망감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모두 잃어버리자 치료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병원 예약을 취소하고 일방적인 단약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