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한 눈을 깜박임 없이 나를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나를 쳐다보는지 참 궁금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으며, 글을 쓰고 있다. 나도 그 눈에 맞추어 쳐다본다. 회피하지 않고 똘이는 여전히 나를 본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서로가 참 사랑한다는 느낌이 오간다. 네가 있어 참 좋다는 느낌이다.
30대 초반부터 강아지를 키워왔다. 몰티즈 종의 보리였다. 나에게는 인형이었다. 행동을 읽지 못하고, 밥만 주면 되는 줄 알았다. 석 달도 안된 보리는 내가 누워있는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오려 했다. 강아지와는 같이 자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밀쳐냈다. 그 후로 보리는 영영 내 가까이에 오지 않았다. 애틋함이 오고 가지 못했다.
“미소” 그 이름만 떠오르면 마음이 울적하고 아프다. 전보다는 덜 아프지만 여전하다. 미소는 8년 전에 우리 집에 오게 된 리트리버종의 반려견이다. 6개월 된 좀 큰 새끼를 강아지샵에서 데리고 왔다. 내 차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는지 꼼짝하지 않는다.. 코를 좌석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 박고 있었다. 불안을 가진 강아지였다.
미소는 크면서 공격적이었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문을 여는 순간 물려고 하였다. 밥을 먹는데 으르렁거리고,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를 물어 상처를 입혔다. 제지하는 동안 나 또한 상처를 입었다. 감당할 수 없어 경기도에 한 훈련소에 맡겼는데도 그 공격성을 사라지지 않았다.
안락사를 결정하였다. 미소와의 마지막 만남이 떠오른다. 모르는 척한다. 냉정하게 돌아선다.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차에 짖음 없이 올라탄다. 울었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왜 나한테 이러한 고통을 안겨주는지, 한편으로는 미웠다. 나의 어리석에 의해 미소를 떠나보낸 것에 대한 죄책감이 강하게 들었다. 키울 능력도 안되면서 키웠다. 다시 한번 미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미소가 환생한 느낌을 갖게 하는 붕붕이가 있다. 미소를 보내고, 시장에 들러 개장에서 갇혀있던 작은 새끼를 사 왔다. 사료도 먹지 못하고 움직이지를 않았다. 다행히 병원에 다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우연찮게 혀를 보니, 미소와 똑같은 모양의 푸른색이 새겨져 있었다. 놀라웠다. 미소가 환생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주지 않고 공격적이었던 미소와는 달리 참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느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감이 이루어진다. 미소가 미안해서 다시 환생하여 나한테 이렇게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닌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붕붕 아 오래오래 함께 해다오. 너와의 인연 부처님께 감사한다.
여러 마리를 키우면서 강아지와 감정을 오고 갈 수 있음을 알았다. 강아지는 상대방의 감정을 안다. 슬프고 화가 나 있음을 알아차린다. 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이다. 똘이는 노년에 홀로 계신 아버지에게 선물한 것이다. 아버지는 똘이와 좋은 유대관계를 맺지 못했다. 아버지는 똘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똘이도 아버지를 무척 싫어한다.
내가 있을 때는 조금만 몸만 움직여도 아버지를 향해 크게 짖는다. 아버지의 효자손에 민감하다. 아마도 어렸을 때 상처인 듯싶다. 새끼 때에 교육시킨다고 윽박지르고 효자손으로 제지하는 것에 상당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면 외롭지 않고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많다.
결혼을 하지 않는 나에게는 똘이는 가족이다. 아버지로 인해 맺어진 인연이다. 나를 위해 식사준비를 해주거나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 그냥 있는 자체가 힘이 된다. 공허함,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러나 위로는 그냥 오지 않는다. 관계에 신뢰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랑이 오고 가야 한다. 제때에 밥을 줘야 하고, 산책을 시켜야 한다.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강아지는 그만큼의 대가를 한다. 전에는 일방적으로 강아지가 주는 줄 알았다. 어리석었다. 서로 배려, 지지, 관심 등이 오고 가야 함을 알았다.
똘이는 아이들이 막 뛰며 걸을 때 “멍”하고 소리를 낸다. 아이들은 놀랜다. 제지를 해도 여전하다. 혹여나 아이들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 나의 감정을 아는지 똘이는 빤히 얼굴을 올려다 쳐다본다. “엄마 내가 뭐 잘못했나요?”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강아지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람 이외에는 감정이 서로 통하지 않고 서로를 위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음에도 서로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주변과의 대인관계가 원만할 때 건강하다고 한다. 그것이 정답일 수 있겠지만,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반려견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우리는 식물, 동물과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굉장히 건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만물의 영장도 아님을 차츰 나이 들면서 깨닫는다. 서로 연결된 관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기에, 이제까지 함께한 반려견에게 고맙고, 너희들이 있었기에 삶이 덜 외로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똘이야, 지금처럼 늘 함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