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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10. 2024

슈퍼맨 슬라이딩

오전 8시 40분.


등교하는 학생들로 벅적거리는 인도 위에서 그야말로 시원하게 슬라이딩을 하고 말았다.


넘어지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인지 내가 특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슈퍼맨이 하늘을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땅에 철퍼덕하고 내려앉았다.


아... 쪽팔린다......

 

**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지난밤, 무슨 이유에선지 새벽 2시 30분에 눈이 번쩍 뜨인 뒤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당연히 비몽사몽 간에 출근길에 올랐고,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룰루랄라 근무지 앞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제 잠을 설친 탓일까 아니면 혼자 손에 든 음료 네 잔이 버거웠던 탓일까?


그도 아니면 크록스 슬리퍼를 신은 내 걸음걸이가 부실했던 탓일까.....?


카페에서 나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무언가에 걸려 몸이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잠이 덜 깨서인지 처음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진짜 눈앞에 슬로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중간에 한 번 중심을 잡기 위해 애를 쓴 것도 같았는데,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결과는 처참했다.


다 큰 성인여성이 슈퍼맨과 같은 자세로 슬라이딩을 할 확률이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될까?


바로 오늘 아침, 내가 그 희귀한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너무너무 창피한 나머지 하나도 안 아팠다.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 채,


아... 어디론가 증발하고 싶다...... 마스크라도 쓰고 나올걸...... 왜 하필 나는 근무지 앞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만 수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잠시 뒤 웅성웅성 소리가 나더니, 어느샌가 어린 학생들이 패대기 쳐진 종이컵이며 컵홀더며 컵뚜껑까지 하나하나 들고 내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것들을 내미는데 더 이상 바닥과 한 몸인 채로 엎드려 있을 수가 없었다.


순간 괴력을 발휘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한마디를 던졌다.


"괜찮으니 등교들 하세요, 호호."


불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 씨... 청바지에 주먹 만한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진. 짜. 진. 짜. 망신스러웠다......


쓰레기가 돼버린 커피잔들을 모두 수거한 나는 빛의 속도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정말이지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초등학교 앞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가득한 회사 앞이었으면... 우와, 끔찍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랬으면 아마 집에 와서 이불킥을 수십 번은 하고, 그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 나는 오른쪽 팔꿈치와 왼쪽 무릎에 고가(?)의 재생밴드를 덕지덕지 붙이고 쓰라린 통증을 참아가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아야 아야 호들갑을 떨면서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살 만한가 보다......


#에헴, OO초등학교 학생 여러분들! 오늘 여러분들이 보여주신 친절함에 진짜 진짜 감동했습니다!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웬 이상한 여자의 해괴한 슬라이딩은 빨리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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