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날 살게 한다

커튼을 열 용기

by 벨 에포크

오늘도 바쁜 일상이 시작된다.

나는 반드시 우리 집 거실의 두꺼운 암막커튼을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선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이할 용기를 다져야 한다.

몇 해전만 해도 내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냥 커튼만 잡아당기면 되는 이 하찮은 움직임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던 적이 있었다.

마음의 병을 얻어 집안에 드는 작은 햇살 줄기조차 용납이 안 되던 그 시간들.

아무리 어두컴컴하다는 궂은 날씨라도 아침은 밤보다 눈부시구나를 그때 깨달았다.


나는 자폐 아이의 엄마다.

나하고는 상관없을 것만 같았던 단어.

장애.

왕년에 안 날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나야말로 왕년에 날렸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였다.

눈부신 청춘시절을 보내고 무난한 상대를 만나 무난한 결혼을 하고 무난한 인생을 살 줄 알았는데.

온실 같았던 시절이 지나고 나니 인생은 그야말로 녹록지 않았다.

꿈같은 신혼을 보내고 금쪽같은 딸을 얻고 2살 터울로 은 쪽 같은 아들을 얻으며 행복하고 또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생이었는데.

둘째가 25개월이 넘어가면서 내 인생은 순식간에 흑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

아닐 거야, 설마, 나중 되면 괜찮겠지...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해도 내 안의 모성이라는 촉은 왜 그리도 정확한지.

첫 자폐 판정을 받고 믿을 수 없어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녀본 거 같다.

몇 번이고 비싼 돈 들여도 시간을 탕진해도 상관없었다.

누구에게든 그저 듣고 싶었다.

아니라고.

우리 애는 자폐가 아니라고.

결국 받아들여야만 할 만큼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나서야 이게 현실이구나를 억지로 깨달아야만 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뭐 때문이지?

난 여태껏 남한테 한 번도 피해 안주고 살았는데.

착하다는 소리만 듣고 살았는데.

초등학교 때 선행상도 받았는데.

내가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왜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내가 뭐 했다고!!

난 내가 이 아이를 키울 수 없을 것 같아. 못 키워.

어떻게 키워야 하냐고.

그렇게 죄책감과 좌절감, 미래의 두려움과 막연함이 뒤섞여 내 마음은 새까맣게 타다 못해 썩어 뭉그러졌다.

내 생애 통틀어 가장 많이 울었던 시절이 아니였을까. 정말 돌아서면 눈물이 나왔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암막커튼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열 생각도 못했지만 솔직히 열기 싫었다.

누가 억지로 열면 화를 냈다.

눈뜨기가 싫었다.

그냥 세상을 등지고 싶었다.

깜깜한 이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니 계속 깜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식음을 전패하고 세상을 등져도 나는 아직까지 누구의 아내고 누구의 엄마여야 했다.

내게는 주어진 현실이 있었던 거다.

나는 현실 부정을 하는 그 순간에도 남편과 어린 딸, 아들이 같이 살고 있었다.

남편 직업상 우리 가족만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친정이나 시댁 카드를 쓸 수 있다거나 애들을 잠시 맡길 수 있는 여건도 안돼서 현실상 독박 육아를 해야 했었다.

그 사실도 잠시 잊고 어둠 속을 헤맸지만 현생을 살고 있는 나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계속 마냥 어둠 속을 헤맬 수 없었다.

남편 출근하는 동안은 애들을 돌봐야 했다.

그러기 싫어도 현실을 억지로 살아내야만 했다.

첫째 손을 잡고 둘째 유모차에 태우고 이유식재료를 사러 마트에 간 날이었다.

슈퍼 출ㆍ 입구에 자리 잡은 플라스틱 작은 화분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 텐데 그날따라 눈에 띄는 초록이들.

키우는 족족 죽이는 식물 살인마였던 내가 왜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어선지 주문에 걸린 듯 그 작은 화분을 몇 개를 사들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정신을 차린 나는 아무리 신경 쓰며 공들여 키워도 이내 말라 비틀어져버렸던 과거 수많은 식물들을 회상하며 이 화분들이라고 뭐 다르겠냐 싶었다. 그랬는데,

다음날 아침 나는 아무렇지 않게 커튼을 열었다.

몇 달만에 처음으로 연 거였는데 이유는 너무 단순한 거였다.

창가에 놔둔 화분.


나도 나의 행동에 놀랐다.

그렇게 두려웠던 아침 햇살이었는데.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밝은 거실.

그 작은 화분 몇 개 때문에 그야말로 집 안 전체로 눈부신 햇살 줄기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그 모습이 내게는 내가 살아야 하는 희망처럼 느껴졌다.

울컥했다.

다른 눈물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풍경이 내게 어마어마한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오늘도 난 거실 커튼을 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마음을 먹고 다지며 용기를 내서 커튼을 연다.

커튼을 열고 아침 햇살을 맞이 할 용기.

오늘 하루도 힘차게 버텨볼 용기.

나의 인생을 차곡차곡 쌓아 올릴 용기.

나는 용기를 내서 커튼을 연다.

<그때 샀던 플라스틱 모종화분이었던 식물이 어느덧 우리집 터줏대감 화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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