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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 에포크 Apr 11. 2023

나의 반창고는 어디 있을까?

사노요코 <태어난 아이>를 읽고

그동안 잘 지내고 계시나요? 요즘 봄날 날씨가 요란하네요. 변덕쟁이 봄이 온 모양입니다.


오늘은 그림책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림책하면 보통 아이들이 읽는 책을 생각하죠. 얇고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아이들을 위한 교훈을 주는 책들이죠. 때로, 좋은 그림책은 어른에게도 깊은 사유와 철학을 전해주고는 하지요.

어떤 경우는 '정말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게 맞아?'싶을 정도로 메시지가 깊고 가슴의 울림이 있는 그림책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전 평소 시를 읽듯, 그림책을 곧잘 읽고는 해요. 그래서 전 아이들이 아닌 저를 위해, 그림책코너에서 기웃거리곤 하는데요.

그중 하나가 사노요코(佐野 洋子, 1938~2010)의 책들입니다. 사노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는 특히나 유명한 명작 중 하나이지요. <100만 번 산 고양이>도 깊은 울림과 사유가 있는 감명 깊은 그림책이었어요.

하지만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사노요코의  <태어난 아이>라는 책입니다.


사노요코 글.그림/황진희 옮김/ 거북이북스 (2016)


그림책의 거친 터치로 그려진 펜 그림이 투박하네요.

손이 가는 알록달록한 그림책들보다는 진입장벽이  좀 느껴지는 표지이지만, 사노요코라는 작가의 이름을 믿고 펼쳐 읽었습니다.




주인공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입니다.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도 없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우주를 떠돌아다니다 어느 날 지구에 도착해 여러 가지 모험과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문장이 있어요.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아서 아이는 사자가 나타나도 무섭지 않았고, 모기가 물어도 가렵지 않았습니다.

구수한 빵냄새가 나도 먹고 싶지 않고, 여자 아이가 말을 걸어도 상관없었고, 강아지가 팔과 다리를 물어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공허하고 뭔가 비어있는듯한 표정.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 반복되는 문장이 왜인지 모르게 제 가슴을 콕콕 찌릅니다. 게다가 그림 속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텅 비어있는 듯한 저 공허한 표정이 어딘가 익숙합니다. 왜 자꾸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자꾸 떠올리는 제 자신이 미울 정도입니다.

아들은 자폐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유독 관심 있는 것들이 드뭅니다. 호기심이나 흥미가 쉽게 생기지 않아 늘 어떤 일이나 수행을 할 때마다 동기부여하기가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의욕이 없는 편이지요. 그래서 익숙하고 편한 것들에만 반응하지요.

아들도 아무런 흥미가 없을 때 가끔 그림 속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처럼 이런 표정을 짓고는 니다. 마치 세상일이 아무 상관도 없는 듯이 말이죠.

그렇군요, 어쩌면 저희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태어났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건 아닐까? 란 생각이 듭니다.


태어난 아이의 표정에는 상기되어 활력이 넘치는 듯 합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각설하자면,

그렇게 아무 상관없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흥미로운 일이 생깁니다.

어느 날 마을 공원에서 만난 여자아이가 강아지에게 엉덩이를 물리고 맙니다. 여자아이는 엄마에게 울며 달려가는데 엄마가 여자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엉덩이에 반창고를 붙여줍니다.

이때, 그 모습을 본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반창고를 붙이고 싶어서 "반창고! 반창고!"를 외치며 태어나기로 합니다!

반창고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고 싶게 만든 기폭제가 됩니다.

아이는 왜 하필 반창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사자도, 모기도, 구수한 빵냄새도, 강아지도, 여자아이도, 아이 앞에 나타났지만 아무 상관도 없었던 아이에게 반창고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반창고가 뭐길래 아이는 태어나기로 결심하는 어마어마한 결정을 하게 된 걸까요?




우리는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의 아이처럼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둘러보다 문득 어떠한 계기로 태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우리가 선택해서 태어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선택 못하는 건 특정 환경이나 부모일 뿐이고요. 다만, 태어나겠다고 선택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 채 태어날 뿐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번 태어난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골똘히 생각하고, 삶의 목적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란 생각도 듭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반창고'에 반응해서 태어나기로 한 것처럼요!


반창고를 붙이고 싶어서 태어난것처럼 태어나기로 한 태어난 아이. 반창고를 보며 뿌듯해하네요.


사실, 작가에게는 눈에 띄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어요. 1938년 중국의 베이징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병으로 일찍 죽은 오빠 때문에 평생 어머니의 폭언과 관계의 불화를 겪었다고 해요. 오빠의 죽음의 그림자는 평생 동안 그녀의 창작과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요.

작가에게 반창고는 어쩌면 작가의 마음의 치유의 반창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반창고란 각 개인의 '삶의 이유'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모두 '태어난 아이'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이제 잘래.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태어난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군요......

정말 공감합니다.

실은, 삶이란 참 피곤하다는 것을요.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헤매기도 하고, 상처도 입으며 깨닫는 여정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사자와 모기에게 위협받고, 강아지에게 팔과 다리가 물려도 상관없던 아이는 태어나고 나서는 모든 일이 상관있어졌습니다.


<태어난 아이>를 가슴속에 담고 싶어  꾹꾹 눌러쓰며 필사했습니다.


이제 상처에 엄마가 반창고를 붙여준 후부터는, 배가 고파 빵을 먹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모기에 물려 가려워하기도 합니다. 바람이 불면 깔깔깔 웃고, 공원에서 만난 여자아이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내 반창고가 더 크다!"라고 외치는 태어난 아이.

어떤 크기의 상처였든 내게는 그 상처를 덮어 치유해 줄 자기만의 삶의 지혜와 이유가 많다고 외치는 것처럼 제 귓가에 울리듯 했어요.

언젠가는 아들에게도 반창고와 같은 진짜 삶의 이유를 찾게 되어 진정한 의미로 '태어난 아이'가 되길 빌어봅니다.




태어난 이상 우리의 인생은 참 피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겪은 상처가 많더라도, 그 상처를 덮어줄 반창고가 있다면, 우리는 웃으며 오늘 하루는 그저 피곤했었노라고 말하며, 내일을 위해 잠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림책을 읽으며 저만의 해석을 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저도 저만의 특별한 인생의 반창고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조용히 덮었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 모두 각자의 반창고를 찾으시길 바라며 이만 줄일까 합니다.

변화무쌍하게 요란한 날씨이지만, 면역 관리 잘해서 봄철 건강에 유의하세요.

저는 또 다른 글로 안부 여쭙겠습니다.

                     

                                    -벨 에포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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