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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째

영원한 나의 1번

by 벨 에포크
우리나라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흔치 않다.
장애인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건 고사하고, 길에서 휠체어 사용자를 볼 기회조차 별로 없다. 신체적 장애인도 만나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정신적 장애인은 오죽할까.(중략)
장애인과의 교류 부재, 즉 장애인에 대한 '미지'는 곧 공포를 낳는다.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하고, 굉장히 예민한 주제여서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할 것 같은 대상, 그게 바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이다.
<'나는'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중에서 p.188

나에게는 진우(가명) 말고도 유진(가명)이라는 아이가 하나 더 있다. 유진이는 정상발달이자,

비장애 형제이다.

그리고 나의 첫째이자 진우의 누나이다.

장애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보호자이자 양육 의무자이다. 이러한 법적 책임을 떠나 나의 혈육이니 엄마가 곁에서 지켜 주고 챙겨주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형제들은 어떨까?

보통 장애아의 비장애 형제ㆍ자매들의 이야기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간과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장애 형제와 산다는 게 당연하다 생각지만 그건 그들의 어쩔 수 없는 가정환경일 뿐이지 사실 당연한 일은 아니다.

그들도 아직은 부모의 보호와 챙김을 받아 마땅하고 인격적으로도 아직은 성장하는 중 이기에 이러한 가정환경은 삶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첫째가 됐든 막내가 됐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위치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이들보다 포기도 빠르고 양보도 당연하다.

정신적 장애를 형제·자매로 둔 2~30대 청년들의 모임 ‘나는’ 홈페이지 http://www.nanun.org/


언젠가 [나는: What about me?]이라는 정신적 장애 형제를 둔 비장애 형제ㆍ자매들의 자조 모임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본인들은 '온전한'나보다 앞으로의 장애 형제들의 보호자로서의 기대와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시간이 더 크다고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스페어타이어'같은 존재로 생각했다는 부분에서는 첫째 생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들은 일찍부터 주변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너까지 엄마가 신경써야겠니?
네가 양보해.
크면 네가(장애 형제ㆍ자매를) 책임져야 해.
너라도 잘해야지.

어른들이 가볍게 던진 이러한 말들에 어린 나이부터 얼마나 큰 중압감과 압박감을 받으며 자라는지. 무조건적 양보와 이해의 강요가 얼마나 그들의 생을 옥죄였을지.

이로 인해 이들의 삶의 결핍이 얼마일지는 엄마인 나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유진(가명)이는 결혼하자마자 한 번의 유산을 겪고 다음으로 찾아와 준 아이였기에 유진이를 낳고 그 무엇보다 기쁘고 행복했다. 게다가 딸이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대로 태어나준 아이이기도 하다. 사실 유진이가 어릴 때 순한 아기는 아니었다. 낮잠은 물론 밤잠도 안 자서 재우려고 차에 태워 새벽까지 목적 없이 몇 시간이고 고속도로를 운전한 적도 있고, 촉감도 예민해서 옷도 아무거나 못 입혔고, 아토피도 심하고 비염도 있어서 먹는 거부터 자는 거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서 진우(가명)가 태어났을 때보다 더 유난 떨며 온갖 신경을 기울여 키웠다. 진우 아기는 오히려 너무나 순해서 손이 안 갔다. 이런 천사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난 '첫째가 너무 힘들어서 둘째로 순한 아기가 나에게 와줬구나'하고 생각했다. 3세~4세 때는 동생을 보고도 투명인간 취급하던 차갑고도 냉정한 누나이기도 해서 우리 부부가 난감해한 적도 적지 않았다.

이 시절을 이야기하면 우리 부부는 아직도 고개를 흔든다. 하드코어 육아 헬의 시절이었다. 그랬었었다.


지금은 어느덧 12살 소녀가 되어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랬던 유진이는 동생을 그 누구보다 예뻐하고 사랑해준다. 이런 모습을 보며 흐뭇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온다.

혹시 유진이의 동생 사랑이 어릴 때부터 나도 모르게 동생을 도와줄 때마다 해준 칭찬 때문에 강화된 행동인 것일까, 그렇게 행동해야 부모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가정환경 탓은 아녔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앞서 말한 '나는'의 인터뷰 내용을 알고 있는 나는 진우의 보호자 대리인이 아닌 유진이가 '온전한' 유진이의 생을 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온전한 유진이만을 위한 사랑을 줄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부할 수 없는 게, 나도 모르게 진우 양육에 대한 어려움이나 양보를 무의식 중에 흘렸을지 모른다. 더 많은 신경을 쓰려고 하지만 나 또한 몸과 마음이 두 개가 아닌지라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생긴다.

그래서 유진이만을 위해 꼭 지키기 위한 교육적 철칙을 세우고 지키려 한다.

1. 유진이와 하루에 한 시간 반드시 둘만의 산책시간 가지며 대화하기.

2. 유진이의 감정들을 깊게 공유하기.

3.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유진이에게 진우에 관한 심부름이나 부탁하지 않기.

4. 유진이에게 자신을 제일 먼저 생각하라고 말해주기.

5. 유진이의 어리광도 기꺼이 받아주기.

나름 지키려고 노력 중이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진우의 어려움과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몸소 직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진우에 관한 일들을 더 나누려 하고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배려하고 생각하는 아이가 되어있다. 조금은 더 이기적여도 될 정도로.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어찌할지 몰라 힘들어한 적도 몇 번이나 있다.

또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모든 경우를 진우 중심으로 생각하며 결정한다.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다고 너 먼저 생각하라고 해도 늘 같은 이야기를 할 뿐이다.

남들은 좋은 누나라고 칭찬해주지만 나는 이런 유진이가 걱정이다.

지금이야 다들 어리니 그럴 수 있지만 이러한 관계들에 관해 심각해지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후회나 원망과 같은.

앞으로의 세상의 따가운 시선과 원치 않게 받게 될 편견들을 이겨낼 내면의 힘을 키워주고 싶다.

정신적 장애를 형제·자매로 둔 2~30대 청년들의 모임 ‘나는’ 홈페이지 http://www.nanun.org/


내가 대신해줄 수 없는 유진이에게 주어진 성장통 같은 통과의례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고 이겨낼 힘을 가질 수 있도록해주는 것 또한 '유진이 부모'로써의 일이 아닐까.

나는 '진우의 좋은 누나'보다는 '유진이다운 유진'이길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해봐야겠다.

앞으로도 나의 <유진이다운 유진이로 키우기> 프로젝트는 계속될 예정이다.

오늘도 어려운 숙제를 마음에 담고 지만 매일 밤 유진이에게 자기 전 꼭 귓속말로 말한다.

"유진이는 엄마의 영원한 1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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