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남매

생애 첫 남매 싸움

by 벨 에포크

아이들의 첫걸음은 기억해도 첫 싸움을 기억하는 부모는 아마 없을 거다. 그리고 아이들이 싸워 줘서 고마운 부모도 아마 없을 거다.


진우(가명)는 아직도 말하는 게 서툴다.

거의 6살이 넘어서까지도 무발화(소리도 못 내는 단계)서 여태껏 진우의 행동과 표정, 눈빛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함께 여서 그런지 그렇게 추측해도 어느 정도 눈치로 대충 진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진우의 누나(첫째)인 유진이(가명)는 그렇지 못했다. 동생과 놀고 싶어도 대답 없는 동생이랑 노는 일은 마치 벽과 노는 거랑 비슷하다며 같이 노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혼자 놀거나 엄마인 나랑 놀아야 했다.

그러다 진우가 조금씩 발성이 되기 시작했고 단어로만 표현하다가 9살 남짓 되었을 때, 들었던 말투를 그대로 녹음기처럼 입력하고 출하듯 반향어(어떠한 상황에서 겪었거나 들은 내용을 말투 그대로 시간이 지나 재연하듯 말하는 말들:녹음 내용을 재생하는 듯한 말투이다)를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일이 발생했다.


때는 작년 여름, 나른한 여름방학 오후.

유진이는 열한 살, 진우가 아홉 살 때 일이다.

첫째 유진이가 한참 슬라임에 매료됐을 때, 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누나를 가만히 보던 진우가 누나 근처를 계속 어슬렁어슬렁 하는 거다.

어떤 장난감이나 놀이에도 관심이 전혀 없던 진우에게는 굉장히 드문 일이라 나도 촉각을 세우며 같이 슬라임 놀이를 권했고 첫째를 보며 눈으로 응원을 보냈다.

진우는 웬일로 서서 슬라임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유진이와 나는 눈을 맞추고 서로를 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우가 무언가에 흥미를 느낀다는 자체가 우리 가족에게는 일생일대의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행여 진우가 도망갈까 봐,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유진이는 자연스럽게 "진우야, 누나 봐봐, 재밌겠지? 너도 이렇게 만져봐, 저렇게 눌러봐"하며 함께 놀이를 유도했다.

드디어 자리에 앉아 누나를 따라 조금씩 조물조물 만지기 시작하는 진우가 신기하기만 했다.

남매의 첫 상호작용 놀이였다.

그러나

그럼 그렇지, 얼마 가지 않아 진우의 흥미는 시들해졌다. 그런데 전에 같으면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등 돌리며 떠났을 진우였지만 그날 진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우는 항상 무언가의 활동을 끝내면 반드시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좋긴 하지만 거의 집착에 가까워서

일곱 살 때, 키즈카페에서 놀지도 않고 1시간 내내 볼풀장 안에 숨어있는 찌그러진 모든 볼들을 전부 분류한 적도 있었다. 이 습관이 누나와의 첫 슬라임 상호작용 현장에서도 작용했다. 흥미가 시들해진 진우는 이때 이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유진이는 계속 슬라임 놀이가 하고 싶었다. 진우가 슬라임들을 집어넣으며 뚜껑을 닫으려 한다.

"진우야, 닫지 마. 누나 더 놀 거야."

진우의 당황한 표정. 다시 한번 정리를 시도했는데 또 누나에게 저지당했다.

위기 촉발의 순간!

진우가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며 울먹이기 시작한다. 감정 폭발(tantrum)이 일어날까 봐 중재할까 하다가 놔두었다. 진우의 그다음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닫아"진우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생전 소리를 안 내던 그 입에서 딱딱한 말투로 단어를 내뱉었다.

유진이가 지지 않고 슬라임 반죽을 누르며 말한다.

유진:"아니야~안 닫아~"

진우: "닫아."

유진: "누나 더 놀 거야. 안 닫을 거야~"

진우: (조금씩 격앙된 목소리로)"누나 닫으꺼야."

유진: "아니. 누난 더 놀고 싶으니까 더 놀 거야."

진우: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정리해."

유진: (약간은 약 올리는 말투) "아직 정리 안 할 거야~"

나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왜냐면 진우가 이렇게 상대방과 오랫동안 -억지로였지만- 스스로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조절해가며 말로만 누군가와 '주고받기'가 된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의 느낌은 마치 아이들의 첫걸음마를 보는 것보다 더 벅찬 감동이었다.

이미지출처-네이버

그 뒤로 첫째가 슬라임 반죽을 들고 다니면서 계속 "싫어"를 외쳤고, 진우는 "뚜껑 닫아"를 반복하며 누나를 따라다녔다. 이런 집요한 설전은 40분 넘게 이어지고 유진이가 목이 쉴 정도가 되고 진우가 울먹거리다 결국 지쳐 울면서 남매의 첫 싸움이 마무리되었다. 비록 감정 격한 전쟁 같은 싸움까지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고집을 주장하며 엎치락뒤치락하며 공격과 방어가 오가는 틀림없는 남매들의 싸움이었다.

그동안 나는 끝까지 말리지도, 어떤 중재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팝콘 각'으로 같이 따라다니며 흥미진진한 눈으로 관전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를 남매의 첫 싸움을 끝까지 목격하고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남매의 첫 싸움은 진우를 겨우 달래주고 유진이도 진정시키며 일단락이 되었다. 남편이 퇴근한 후, 남편에게 애들이 싸웠다고 들떠서 기쁘게 설명한 엄마는 나뿐이었으리라.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유진이가 진우와의 싸움으로 감정이 많이 상하진 않은지 걱정이 된 나는 유진이와 저녁 산책 때 진우랑 싸워서 속상한지 물었다.

그때 유진이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니~오히려 좋았어. 난 주변의 친구들이 동생들이랑 싸운 이야기 하면 부러웠거든. 난 싸워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엄청 특별한 남매라고 생각했어. 근데 오늘 드디어 흔한 남매가 됐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흔한 남매가 됐다니.

흔한 남매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유진이는 이 경험 한 번이 없다고 삶 한켠의 부재를 느꼈구나를 알게 된 나는 눈물이 났다.


흔하지만 작은 경험들이 사실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감사한 일인지 우리들은 가끔씩 잊고 산다. 그것이 싫은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아이들도 경험을 통해 성장하지만 그 성장은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부모의 성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 경험을 통해 배웠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말이 떠오른다. 육아(育兒)의 아(兒)는 兒가 아니라 자아(自我)의 我라고.

육아 育我.

아이를 기르며 나도 나를 기르는 것이, 부모라는 것을 깨닫게 된 고마운 경험이었다.

화제의 슬라임. 지금도 남매는 종종 마주앉아 만지작 만지작 잘 가지고 논다. 다행히 싸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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