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멀티버스

너는 나의 4분의 1

by 벨 에포크

나는 친정에 가면 부모님의 막내딸이다.

나는 남편에게는 잔소리쟁이 아내이다.

나는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의 맏며느리다.

나는 쌍둥이 중 한 명이고 오빠에게는 손 많이 가는 여동생들 중 한 명이다.

나는 첫째 유진이(가명)에게는 친구가 되고픈 엄마다.

그리고, 나는 장애를 가진 막내 진우(가명)의 엄마다.

이렇게 쓰고 보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없이 쓸 수 있을 듯하다. 쓰고 보니 표면적ㆍ공식적으로도 '나'는 많은 유니버스를 가지고 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따라 내 역할과 나의 애티튜드(attitude)

는 바뀐다. 누구나 나처럼 '타이틀의 멀티버스(multiverse)'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제껏 진우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줄곧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진우의 엄마였다. 내가 걸치고 있는 수많은 멀티버스가 존재하는 데도 한 유니버스에서만 자리를 깔고 움직이지 않았던 거다. '장애'라는 이 한 단어는 나의 십여 년의 시간과 에너지를 송두리째 보내버린 엄청난 세계였던 것이다.

출처-네이버 다중우주 이미지

진우의 엄마라는 방패로 나 몰라라 등진 멀티버스들이 많았다. 나의 멀티버스 중 가장 내팽개쳐져 있던 곳은 바로 "나"의 영역이었다. 아이를 둔 많은 엄마들이 그렇듯 '원래의 나'를 등지고 살게 된다. 나도 그랬다. 진우라는 핑계로 나는 "나"를 아무렇게나 방치했다.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었다. 진우가 열 살이니 십 년을 그리보냈다. 어느덧 정신 차리고 보니 마흔이 넘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십 년 동안 방치되었던 "나"라는 유니버스는 완전 폐허의 상태였다.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고, 여유나 취미 따윈 사라진 지 오래고, 계절이 언제 오가는지도 모르는 오직 애만 보는 '애바보'만 존재하고 있었다. 진우가 칭찬받으면 내가 칭찬받는 걸로 삶의 위안을 얻었고 진우가 야단맞으면 내가 야단맞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눈물지었다. 아이와 내가 일체인 듯 보낸 안타까운 시간만 가득한 나의 유니버스였다.


이런 모습이 안타까운 친정부모님들이 늘 해주신 말이 있었다.

"진우는 너의 인생의 4분의 1일뿐이라고."

그리고

"진우에게 잡혀 먹히지 말라고."

아마도 우리 가족이 4인 가족이라 나누어 말씀하신 것일 테고, 진우만 보고 애태우며 살지 말라는 말씀을 좀 과격하게 표현하신 걸 테다. 결론적으로는 모두"너의 인생도 살아라"라는 말씀이실 거다. 오래전부터 잔소리처럼 들은 말인데도 사실 십 년 전 나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제야 돌아보게 된 거 보면 나도 제법 베테랑 엄마가 되어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이 후회되거나 싫거나 하진 않다. 그 시간들 또한 열심히 산 나의 모습이니. 이제라도 나를 돌아볼 생각을 했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출처-네이버 이미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여러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 이 시간이 내게는 아주 소중한 순간들이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나"를 돌아보며 "나"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공간과 이 짧은 시간이 내게는 하루 중 다디단 순간이 되었다.

이제는 "원래의 나"의 멀티버스는 없어졌다.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부터 "중년이 된 나"라는 새로운 멀티버스의 영역이 열린 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시간이 걸릴 테지만 분명한 건 난 그곳에서 '온 힘을 다해 꾸려나갈 것'이라는 거다.

이 멀티버스에서의 나는 적당한 시간의 흐름도, 계절의 변화도 느끼며 오롯이 "나"에 대해 집중하는 여유도 꼭 챙길 것이다.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공간.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방해도 받지 않는 곳으로 조금씩 알차게 만들어 갈 것이다.

물론 그 밖의 멀티버스들도 열심히 오가며 챙겨야겠지만 "나"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겨 즐겁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나만의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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