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칸트(Kant,1724~1804)가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같은 시간에 하는 일들을 반드시 지켰다고 한다. 비바람이 불어도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으며 산책을 나가면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는 칸트를 보며 시간을 맞췄다는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진우도 칸트에 지지 않는다. 기가 막히게 그 시간에 무엇을 한다는 게 딱 정해져 있다.진우가 무슨 단어만 내뱉어도 나는 몇 시인지 알 수 있을 경지다.
진우는시계를 볼 줄 모른다. 그런 진우가 시계를 볼 리 없으니 체내 시계가 신기할 뿐이다. 모든 일을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정해놓고 미리미리 대비할 수 있게 패턴화 해서 복잡하고 정신없는 이 세상을 살기로 한 모양이다.
수많은 루틴을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유독 강경한 진우만의 규칙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1. 우리 집에 사람 수는 정해져 있어!
우리 집 가족 엄마, 아빠, 누나, 진우 외의 사람이 오면 경계한다. 손님이라도 오시면, 10~20분 정도는 그래도 참아준다. 그 시간이 지나면 불안이 급상승하고 나중에는 손님 앞에서 단답형 말투로 "나가야 해", "정리해",
친절히(?) 가방까지 챙겨주며 "집에 갈 거야"를 반복하며 재촉하는 바람에 나까지 민망해져서 결국 손님 부르는 게 힘들어지고 말았다. 그 손님이 일정한 날짜, 일정한 시간에 머무른다고 미리 한참 설명하고 겨우 납득시키면 받아들이겠지만 예약도 아니고 가게도 아닌데 어느 손님이 그럴까.... 죄송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결국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약속을 잡는 편이 되었다.
2. 반드시 그것만!
우리 집에는 진우를 위해 만든 일과표가 벽에 걸려있다. 전날 밤이나 당일 아침 스케줄을 확인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나면 진우는 반드시 그 시각적인 자료에 붙여진 그대로 칼같이 해야 한다. 이변이란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스케줄표대로 똑같이 되나. 중간에 일이 생기기도 하고 요즘 시국이라면 갑자기 치료나 수업이 중지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진우에게는 큰 충격이다. 울고 불며 분노가 최고조로 치솟는다. 누가 보면 학교나 치료실 가는걸 아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다. 그게 아니라 단지 스케줄대로 이행을 못하는 것이 싫은 거다. 그래서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면 진우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그래서인지 치료실, 병원, 복지관등은 물론, 선생님도 웬만하면 바꾸지 않는다. 진우 주변의 선생님들도 학교를 제외하면 대부분 진우와 3~4년은 기본으로 함께 한 분들이다.
진우의 하루를 결정하는 스케줄표
3. 주차장입구는 내 구역
우리 집 식구들은 반드시 저녁 산책을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불지라도!(아프면 예외지만) 심지어 유진이와 진우의 코스는 다르다.
처음에는 다 같이 나갔다. 진우의 최애 산책코스는 우리 동네에 위치한 문화센터 건물 주차장 앞이다. 왜냐하면 진우는 '오르막 내리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차장 입구에 서 있으면 자동차가 올라오면서 경고등이 켜지며 사이렌 소리가 나는데 이런 모든 움직임들이 진우에게는 재밌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의 순간이다. 시각과 청각과 움직임의 감각 충족이 3in1으로 해결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주차장 입구가 잘 보이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10분이고 20분이고 차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일부러 퇴근시간에 맞춰 산책을 한다. 그래야 확률적으로 많은 차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녁 산책이 된 이유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지루한 유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산책 코스를 따로 짜기 시작했다. 유진이의 권리도 중요하니 부부는 각자 한 명씩 맡아 지금은 따로 산책을 다니게 됐다.
이 날도 강추위의 겨울이고 주말이였지만 예외없이 주차장입구로 산책했었다.
요즘도 급식실을 가기 위해 첫날 며칠은 입구까지만, 그다음은 며칠은 급식실 안 구경을, 그다음 며칠은 급식실 안 책상에 한 번만 앉아보고, 그다음 며칠은 줄 한번 서보고, 그다음 며칠은 음식만 받아보고, 그다음이 돼서야 한 스푼을 시도해본다. 집에서도 물론 식판으로 연습하고 남은 음식을 정리하는 연습을 반복한다.
진우에게는 새로운 것을 새로운 루틴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세세한 마음의 준비와 적응이 필요하다.남들이 당연하게 그냥 한 번에 되는 것들도 진우에게는 돌고 돌아 많은 시행착오와 시간을 들여 도착하는 미로의 도착점과도 같다.
이미지 출처-miromiro님의 블로그 미로도안
이렇게 나열해보니 아들 험담을 쓴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진우의 루틴 고집(?)을 써본 이유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루틴이 있다.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 집 막내 진우도 그렇다. 진우에게는 다른 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기준과 다른 속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다르면 다른 대로 나름의 해결 방법이 있기도 하다. 다만, 진우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단계를 거치므로 시간이 필요하다. 진우가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규칙을 받아들일 시간. 적응하기까지 진우에게도 실패의 경험과 인내가 필요하고, 그동안까지는 안타깝게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사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이 장애라는 이유로 당연하지는 않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고 그렇게 안 하기 위해서라도 집 안팎으로 열심히 반복하고 연습하며 노력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속도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도 있다는 걸 쓰고 싶었다.다르지만 다르다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조금의 여유가 간절해진다. '네가 모자라니 내가 봐줄게'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정과 존중, 그리고 조금의 관용의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