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고민

첫 고백

by 벨 에포크

수업이 끝나면 꼭 전화하라는 나의 당부에 힘입어 열두 살 첫째 유진(가명)이는 다행히도 꼬박꼬박 하굣길에 전화를 한다.

"엄마, 오늘 엄청난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

"지금 말할 수 없어. 집에 가서 얘기할 거야."

"그래~알았어."

언제나 매일 엄청난 일이 있다는 딸내미여서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평소 날씨만 좋아도 유진이는 날씨가 엄청나다고 말하는 애니, 그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집에 들어온 유진이는 가방을 정리하고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았다. 간식을 챙기며 나는 유진이가 매일 외치던 그 흔한 '엄청난 일'을 듣기 위해 마주 보며 식탁에 앉았다.

또 어느 길가에서 '엄청난' 들꽃이라도 발견했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별 기대도 없이 듣는데,

"나 고백받았어."

그 순간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전두엽에 불이 켜지며 내 머리 위로 강렬한 느낌표가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내가 고백받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콩닥거렸다, 아니, 쿵덕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티 안 내려고 열심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누군데?"

"그냥 우리 반 남자애야, 근데 엄청 장난꾸러기야."

"걔도 엄청 용기 있다~뭐라면서 고백했어?"

"그냥 쪽지 주고 갔어. 쪽지 주면서 타이머까지 키면서 30초 내로 대답하라고 하더라. 근데 난 너무 놀라서 엄마랑 의논하고 싶어서 내일 얘기해주겠다고 했어."

고백을 투표권으로 만든 그 친구ㅎㅎ 딸은 스스로 칸을 만들어 체크했다. 다들 나름 진지하다.(귀엽다,귀여워~♡)

딸아, 사랑도 엄마랑 의논하겠다니 감사한데 니 마음이 중요하지~

"넌 어떤데?"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난 솔직히 부담스러워. 그냥 친한 친구였으면 좋겠어."

"그렇구나. 그럼 미안하다고 거절해야겠네."

"근데 그러다 그 애가 나랑 안 놀면 어떡해? 새 학기일 때 걔가 먼저 말 걸어주고 장난 쳐줘서 학교생활이 엄청 재밌었단 말이야. 내가 거절하면 이제 어색해지잖아. 걔는 왜 하필 고백을 해가지고..."

그 남자 애에게는 안타깝게도, 아직 이성에 눈이 안 뜨인 유진이였다. 핑크빛 사랑의 감정보다 학교에서 같이 장난치는 친구가 없어질까 봐 더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 반에 아이돌보다 더 예쁜 애가 있어. 얼굴도 엄청 하얗고 눈도 크고 몸도 날씬하거든? 난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부끄럼도 많은데 왜 나한테 고백했을까? 날 골탕 먹이려고 그런 거 아니겠지?"

심지어 자기 의심까지.

"사람들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기준이 다를 수 있어. 그 친구는 아이돌처럼 예쁘다는 친구보다 너에게 매력을 느꼈으니까 고백한 게 아닐까? 자신감을 가져~우리 유진이가 장점이 많잖아. 친절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잘 웃는 얼굴이니까."

열심히 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유진이는 그저 갸우뚱할 뿐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고민이야~내가 yes를 하면 사귀는 거잖아. 근데 난 그냥 친구로 지내고 싶어. 근데 no를 하면 같이 못 놀잖아. 엄마가 나 같으면 뭐라고 말해줄 거야?"

열두 살 인생의 첫 고민을 하는 얼굴을 보며, 귀여워서 얼른 대답해줘야지 하다가 멈칫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너의 생각이나 감정이 제일 중요해. 네가 잘 생각해봐 봐."


사실, 이날 난 뿌듯했다.

'그래도 우리 딸이 누군가에게는 호감이 가는 사람이구나. 다행이다.'그리고 '컸구나...'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어렵다는 '인간관계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싶은 생각에 걱정과 비장함마저 느낀 날이기도 했다.

사실 이게 진짜 사랑도 아니고, 열두 살짜리들이 무슨~ 하고 피식할 정도로 넘어갈 가벼운 해프닝일 수도 있는데 엄마인 난 왜 이리 진지한가.

여전히 닌텐도 게임과 마인크래프트를 좋아하고 매일 슬라임에 열광하며 오늘도 깔깔거리며 소파에서 점프하는 네가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씩 성장할 준비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시큰해졌다.

이미지 출처_네이버

늘 행복 가득한 동화 속에서 사는 것처럼 살던 네가 삶의 이런저런 위기에 봉착하고 고민하며 또 어떨 때는 아파하기도 하면서 점점 어른이 되어가겠구나 하는 생각과 그 모습을 지켜봐 줘야 한다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그날 그렇게 쉽게 잠들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나도 참 반 친구의 쪽지 한 장으로 딸의 인생 전체를 밤새 생각하는 딸 팔불출 엄마다.

그다음 날 이야기는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생략할까 한다.

그 뒤로도 계속 나는 유진이와 앞으로 겪을 친구관계라든가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많이 그리고 자주 나눈다. 이런 이야기가 전에는 지루했는데 지금은 재밌다는 유진이.

그래, 잘 크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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