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 에포크 Jun 09. 2022

신경 다양성(Neurodiversity)을 아시나요?

그 씁쓸함에 대하여

나는 최근 유독 "신경 다양성(Neurodiversity)"이라는 용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맨 처음 접한 건《뉴로트라이브》라는 책이었다. 여기서는 그르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여러 번 반복해서 눈에 다.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란 책에서는 아예 신경 다양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번에 브런치 글에도 올렸던 《자폐 거의 모든 역사》에서도 여러 번 언급이 되었고, 《스파크》의 저자 엘 맥니콜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이 단어를 접했다.  모두 영ㆍ미권 작가들이다. 이처럼 서구권의 여러 서적에서 발견된 신경 다양성이라는 게 뭘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브런치를 통해 간단히 리포트해보기로 했다.

※ 신경 다양성에는 자폐 특성, 지적 스펙트럼, ADHD, 다운증후군, 난독증, 조현 스펙트럼, 성격장애 등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그중 내가 주목한 것은 '자폐 특성'이다. 자폐 특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음을 미리 양해의 말씀을 올린다.

우리는 각자 다른 개성과 다양함을 가지고 있다.(이미지 출처_네이버)
정의 및 개념

신경 다양성(Neurodiversity)은 

이례적인(신경에서 전형적이지 않게 달라지는) 신경발달은 정상적인 차이일 뿐 이므로, 이 같은 차이는 용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정의이다.(책《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참조) 또한, 신경증 일부 정신증 등 정신질환 그로부터 비롯된 행동 양상을 장애가 아닌 비장애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뇌신경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다름(예) 자폐 특성, 지적 스펙트럼, ADHD, 다운증후군, 난독증, 조현 스펙트럼, 성격장애 등)을 다양성으로 포함시키고자 노력하는 인식이다.(위키백과 참조) 이러한 정신적 특성이 다양한 삶의 방식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사교적인 삶을 사는 이도 있듯 반대로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즐겨하는 이의 삶도 차별하지 않고 개성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나무 위키 참조)

신경 다양성에 대하여

 신경 다양성이라는 용어는 영ㆍ미권에서 1999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자폐 권리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신경 다양성 지지자 중 일부는 자폐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고, 자폐증은 일상적인 업무로 고생할 수 있으며, 자폐증은 장애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지원이 실제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롭지 않은 특징들을 억압함으로써 자폐적인 사람들을 "신경 전형적인 것(일반인)으로 합격"하도록 훈련시키거나 치료하는 중재를 거부하면서 자폐적인 사람들의 경험과 자기표현을 존중하여 장애와 동시에 정상적인 다양성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서구권에서는 이러한 절충적 관점이 사회적으로도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적 도움이란 게 비자폐인이 주도하는 자폐에 대한 '치료'가 아닌 사회적 차별이나 불편함 등으로 고통받는 점에 있어 그들의 편의에 맞는 '지원'을 하자는 것이다.(나무 위키 참조)

다양성의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이루어진다.(이미지 출처 _네이버)

그들의 능력을 사회 적소에 환원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기회를 제공하자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보통 자폐인의 경우, 공감능력이 떨어지므로 공감 서비스 업종보다는 분석하고 체계를 구분하는 업종 등의 인재양성을 위한 환경과 걸맞은 교육이 이루어지게 하는 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자폐/아스퍼거 관련 단체들은 신경 다양성이나 자폐 권리 운동을 지지하는 자폐 인권단체인 경우는 서구권과 달리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자폐 관련 단체나 기관이라 하면, 거의 다 학부모 단체, 주류 의학계 종사자, 한의학계, 아니면 아예 극단적인 비주류 백신 음모론자이기 때문이다.(나무 위키 참조)

나의 생각

다시 말해, 사회적 잣대가 정신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들(일반인)의 기준이라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아이를 사회의 구성원의 한 일원으로써 인정받는다는 건 환영할만한 이야기이다. 심지어 구구절절 옳다. 내용 모두 감되고 내가 아들을 바라보는 나의 가치관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한참 이른 개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은 아직은 이러한 이상향과의 거리가 멀다. 신경 다양성 운동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다. 서구권에서도 분명 한계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부러운 점은 조금씩 그 이상향에 가까운 내용에 대한 고찰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신경 다양성에 대한 사회운동이 직접적인 행동과 사회 움직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그 사회적 '분위기'이다.

가슴 아프게도 우리나라의 장애인식은 마치 로딩 걸린 옛날 컴퓨터 같다. 아주 조금씩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멈춰서 있듯 더디 움직인다. 부모인 나부터도 아들이 방과 후 다니는 여러 발달센터들을 "치료실"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아이의 단점만 바라보고 표준에 맞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강제적 환경에 억지로 욱여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과 아이러니 (이미지출처 _네이버 이미지)

신경 다양성의 인정은 고사하고 작은 도움이라도 받기 위해 (나라 보조금과 같은 혜택이나 특혜가 아닌 최소한의 인권을 뜻한다.) 내 아이를 더 심한 장애라고 증명해야 하고, 이를 국가에서 인증받아야 한다. 

장애판정을 받지 않으면 누구의 관심도, 도움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의 특성을 독특함이라고 개성이라고 말하고 생각하면서, 병원에서 장애판정 검사를 하고 나라에서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복지카드'를 받아야 하는 현실. 이 괴리감과 아이러니에 양육자로서 마음의 가책과 혼란스러움만 남았다.

그저 아이에게 있는 그대로 너답게 살아가길 바랄 뿐인데 이러한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서구권과 같은 신경 다양성에 대한 움직임과 목소리가 우리나라에서도 나오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스파크(Spark·불꽃)를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