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 에포크 Nov 11. 2022

비워내기

그리고 채워나가다

요 며칠간 미디어를 일부러라도 멀리했다.

머릿속 과부하를 잠재울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리석은 둠스크롤링으로 심신이 모두 지치고 말았다. 내 머릿속에 가든찬 것들을 비워내기 위한 셧다운이었다.

글을 쓰면 정리도 되고 도움이 되건만,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들어서 몇 번이고 시도해보지만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잠깐씩 필요한 것들을 확인하는 것 제외하고는 폰을 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때 하루 종일이라도 좋다고 들어와 부유했던 브런치 시간도 줄어들었다.

나의 마음속에서 넘쳐난 것들을 덜어내고, 비워내며 조금씩 흩어진 마음들을 추스리기 위해 조금 더 평범한 나의 일상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여전히 소중한 나의 일상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지출처 _ 네이버 이미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멈춰지지 않고 나를 괴롭힐 때, 이 방법 저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을 때 나는 몰입할 무언가 찾는다.

그중 하나가 집안 리폼이다.

나는 솔직히 집안일에 소질이 있는 편도 아니고 잘하지도 못한다. 평소 청소를 깨끗이 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오로지 집중할 거리로 리폼할  때가 있다.

10여 년 동안 살고 있는 우리 집은 25년이 넘어가는 꽤 나이를 먹어가는 아파트이다.

이사 오기 전, 미리 제대로 리모델링하는 요즘 시대라지만 우리 집은 이사날짜도 빠듯했었고, 그럴 여유도 없어 대충 급한 도배나 수리에 가까운 간단한 리모델링만 하고 바로 들어왔다.

한참 아이들이 어릴 때 이사를 왔고 아이들이 있는 집은 대부분 그렇듯 이리저리 막 굴리며 살다 보니 슬슬 집 안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타일로 된 벽은 깨지고, 벽지는 아이들 낙서로 가득하고, 틈새는 벌어지고, 수도에서 물도 새고, 가구 색들은 빛을 바라간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응급 리폼이었다.

하고 있으니 잡념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바르고 말리며 며칠이고 걸리는 리폼 작업도 있고,

몇 시간 만에 뚝딱 해결된 리폼 작업도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집에도, 나에게도 도움이 됐다.

그 뒤로,  복잡한 심경을 비우고 싶을 때 나는 집에 손을 댄다.




리폼하기 위해선 주변을 정리하고 청소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끄집어내고 버릴 것들을 처분하고, 정리하며 먼지를 쓸어낸다.

상처 나고, 깨지고, 찢어진 부분들을 찾아 정성스레 보수를 하고 기분전환으로 가구의 위치도 바꿔준다.

이때까지 해온 리폼들을 되돌아보니, 이것 저것 많기도 하다.

낡아서 해어진 가죽소파를 덧씌워 바느질하기도 하고, 누래진 부엌 찬장 필름지로 덧붙이고, 기름때로 더러웠던 부엌 타일 교체하고, 아이들 낙서로 더러워진 벽지 값싼 플라스틱이지만 마음에 드는 패널로 붙이고, 깨진 벽을 클레이로 채워 덧붙여서 보수하고, 욕실에 떨어져 나가는 틈들을 찾아 실리콘으로 붙여주고...




이런 작업들이 내게는 어떠한 의식을 위한 수행과도 같다.

이러한 나의 끝없이 이어지는 쾌쾌 묵은 부정적인 생각들과 감정들을 억지로라도 끄집어내어 비워내고 정리하고 청소하며 쓸어낸다.

보수하는 과정은 마치 헐벗고 상처 난 나의 마음을 덮어주고, 덧붙여주고, 이어주는 것만 같다.

그렇게 리폼이 끝나면 나의 머릿속도 어느새 비워진다.

그러고 나면 비워진 곳에 나의 하찮아도, 소소해도, 누가 뭐라 해도 소중한 작은 일상으로 채워나간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이야말로 사실은 최고의 회복약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일탈은 가끔 해야 그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남의 눈에는 지루하고 하찮을지 모를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치유해주고, 채워준다.

우리가 특별히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들 모두가 우리가 지겨워하는 일상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다.


해어진 가죽소파 리폼, 누래진 부엌 찬장 필름지로 리폼, 기름때로 더러웠던 부엌타일 교체, 아이들 낙서로 더러워진 벽지 패넬로 덧붙임, 깨진 벽 보수, 욕실 떨어진 실리콘 작업




끝내고 나면 역시 보잘것없는 아마추어라 리폼한 곳이 티가 팍팍 난다.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뿌듯하다.

상처가 아물면 흉터가 남듯, 그렇게 훈장과도 같은 흔적이 남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나씩 보수해 나가다 보면 손때 묻은 곳에 애정이 깃든다. 애정이 없다면 고치지도 않으니까.

하고 나면 몸살은 덤이지만 이렇게 나만의 의식을 치르고 나면 마음만큼은 사랑스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런 작업들은 나의 마음도 어루어 만져준 것처럼 어설퍼도 제법 버틸 수 있게 보수되어 있다.

나를 사랑하니까 비우고 치우고, 고치고 때우며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이런 몸살쯤이야.

 



작가의 이전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