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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 에포크 Nov 15. 2022

상상 놀이

그러나 너는 싫어하는

나는 상상(想像)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즐긴다.

상상하는 것만큼 재밌는 놀이가 또 있을까.

기발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눈치 볼 이유도 없다.

눈앞에 그려지는 공상은 오롯이 나만 알 수 있고 나를 위한 자유로운 시간이다.

그것이 실체가 없다 할지라도.

오감은 상상의 재료가 되어주고, 나의 전두엽 저편 기억창고에서 밑그림들을 찾아 요래조래 혼자서 섞어내면 나만의 상상은 어느덧 눈앞에 펼쳐진다.

이러한 상상은 늘 즐겁다.

다들 하루에 상상을 몇 번이나 하는 걸까?




가을이 한층 짙어졌다.

세상은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 갈색의 옷을 갈아입고 봄 못지않은 화려함을 뽐낸다.

어느새 소복이 쌓인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노란 황금색 융단(絨緞) 길을 걸으며 느긋한 걸음을 내디뎌본다.

'가을이구나...'

이리 보니  화려하다. 낙엽이 빙그르르 떨어질 때마다 노란 드레스를 휘날리면서 춤을 추는 무희(舞姬)들 같다.

알록달록 물든 가을 나무들은 쓸쓸하기보다 마지막 힘까지 끌어올려 자신을 치장하고, 마지 호화롭게 가을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며 퇴장하는 듯하다.


노란 황금 카페트 위를 걷는 것만 같다.


이번 가을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지난 가족 소풍 때 아이들과 함께 낙엽들을 하나씩 주웠다.

제법 많은 낙엽들을 주웠는데 집에 와서 언젠가 만들기 하면 좋을 것 같아 미리 책갈피에 끼워 잘 펴놓았다.

그리고 지난 주말 낙엽들을 재료로 아이들과  '가을놀이'를 하기로 했다.

가을만 할 수 있고 가을이기에 안성맞춤 놀이라 우리끼리 '가을 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저번 아이들과 함께 한 '종이컵으로 몬스터 만들기'가 호응이 좋았던 터라, 이러한 미술활동은 첫째 정서에도 좋고 둘째 소근육 활동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8절 도화지에 물감놀이도 하고 이걸로 배경 삼아 낙엽 붙이기를 해보았다.

물감색칠놀이는 언제 해도 즐겁다.

상상을 하니 그저 즐겁다.

낙엽으로 상상의 나라로 갈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가족들이 모여 낙엽을 이리 조리 붙여가며 각자의 상상을 펼쳐 보인다.

정해진 규칙이나 룰은 없다. 그저 자유롭게 표현하면 되는 거다.

즐거우면 됐지.

바닷속 물고기도 표현해보고, 첫째는 요즘 즐겨하는 쿠키가 장애물을 뛰어넘는 게임을 표현했다. 나는 춤추는 낙엽 요정을 상상했다.

첫짜가 만든 게임장면과 내가 표현한 낙엽요정

자, 드디어 아들 차례.

그러나 머뭇거리는 너의 손.

사실 자폐성 발달장애 친구들은 아이들마다 다르겠지만 '상상하며 논다'게 어려운 일이다.

전반적으로 뇌신경 혹은 뇌 호르몬 물질들을 억제하며 추상적인 사고에 브레이크가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부적 또는 내부적 환경이 주는 과부하되는 감각들은 끊임없이 뇌 활동을 방해하고, 보는 이미지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현실에 없는 것을 있다고 가정하는 일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상징놀이가 가장 어려운 놀이이다.

또한 정해진 룰 안에 있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봐란 주제는 오히려 아들이 혼란스러워하고 가장 난감해한다.

그래서 여전히 아들에게 있어 제일 어렵고 힘든 게 자유로운 상상놀이이다.

단순하게 소근육 활동놀이라고 생각했던 나도 '아차' 했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상상을 즐기는 이 엄마 입장에서 보면.  

결국 이날 가족들과 함께하는 '가을 놀이'는 아들에게 더 이상 놀이가 아닌 수행해야 할 미션이 되고 말았다.




엄마로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경험'시켜주고픈 욕심도 있었던 것 같다.

바닷속을 표현하자고 정하고 물고기 그림을 보여주며 똑같이 그리자고 말해주었다. 함께 물고기도 같이 그려보고 난 다음, 물고기 모양을 점선으로 임의로 표현해주었다. 아들은 낙엽을 스티커 붙이듯 점선 모양대로 붙이고 눈도 그려주었다.

아들과 함께 만든 바닷속 풍경

이런 게 상상놀이 일순 없겠지만 아들에게는 '경험함'으로서 머리에 각인이 되고 이를 토대로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는 기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은 싫었나 보다.

자신 없는 것을 하라고 하니 심술이 난다.

결국 이내 불퉁한 얼굴을 하고서는 다른 종이에 크레파스로 분풀이하듯 휘갈긴다.




아들 스스로도 안다. 스스로가 봐도 결과도, 과정도 자신 없는 것이라는 걸. 자신 없는 일은 아예 포기하거나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누구든 자신 있는 일이 몇 개나 되고, 또 자신 있는 일만 할 수 있을까.

자신 없는 것에도 도전해보고, 못한다는 걸 인정도 해보고, 잘해보려고 노력도 해보고, 그렇게 하다 보면 잘해지기도 하고...

이런 게 다 인생의 과정이고 경험이라는 걸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갈겨진 크레파스 분풀이 위에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방차를 그려준다.

아이 손위에 내손을 얹어 그려보려 하는데 아들은 심통이 난지라, 손을 내가 움직이는 대로 맡겨주지 않고 안 그리려고 힘을 줘서 제대로 된 형태도 안 나왔지만, 그래도 그렸다.

 그리고 나니, 소방차라는 걸 알아본 아들.

그제야 스스로 물줄기를 그리기 시작한다.

엄마가 사다리라고 그려둔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자기 나름대로 사다리가 아니라 물 호수를 떠올린 것이다.

옆에 내가 얼른 낙엽을 붙이고 "불이 났어요!" 해보지만 아들은 여전히 어리둥절.

'엄마는 왜 나뭇잎을 보고 불이라고 하는 거지?' 하는 표정이다.

그래도 나는 놀랍고 또 기특했다.

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소방차의 호수와 물줄기를 떠올린 것이다.

아들의 상상은 경험에서 시작되는구나.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들이 상상하며 그려낸 소방차의 호수와 물줄기.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상상을 하지만, 이 또한 일정 인지 수준이 완성되어야지만 할 수 있는 인간만이 지닌 훌륭한 능력이다. 

상상은 외부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속에서만 만들어 내는 이미지나 사고를 뜻한다. 

인간이 인지는 감각과 지각뿐만 아니라 상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상상은 물리적 자극이 없다. 물리적이고 외부 자극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떠올리는 이미지가 상상이다. 상상에는 시공간도 물리적 현상도 초월한다. 그래서 자유롭다.

나는 아들이 상상하면 즐겁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잘 안 되는 것도 상상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아들이 들어가 나오지 않는 그 세계는 참으로 느리고 또는 멈춰져 있는 무(無)의 공간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가끔이라도 좋으니 아들에게 경험이라는 물감으로 알록달록 채색된, 신나게 움직이는 상상의 나라로 초대하고 싶다.

상상의 나라에서 어느 속박도 없이, 누군가의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상상의 세계에서 마음껏 놀았으면 좋겠다. 

그 첫걸음을 시작했으니 앞으로의 세상이 기대가 된다. 

앞으로도 어떻게든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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