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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이는 별 Mar 31. 2022

은퇴후 계약직에 근무하다

인생칠십 고래희 3



 퇴직 후 시간이 아까웠다. 고령자 취업으로 고용노동부 계약직에 지원했다. 일차 서류 심사에 합격하고 면접시험을 보러갔다. 학교가 아닌 곳은 어떤지 호기심에 가득 찼다. 옷도 정장으로 한 벌 싸들고 가 대기실에서 미리 갈아입고 기다렸다. 임원인 듯싶은 사람들 여덟 명이 저만치 앉아 번갈아 가며 질문을 했다. 면접 대상자 세 명이 나란히 들어가  앉았다. 티비 드라마에서 보던 대기업 입사 면접시험 장면과 똑 같았다. 청력이 좋지 않아 그들의 입모양과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의 대답소리를 집중해 들었지만 질문과는 비켜간 대답을 했는지  추가 합격자가 되었다. 다행히 일자리를 받게 되었다. 이름과 사진이 새겨진 명패를 목에 걸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사무실 출입구엔 내 사진과 이름도 다른 직원과 함께 올라갔다. 새로운 호기심도 잠깐 온종일 의자에 앉아 컴퓨터만 바라보고 일하는 게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재미가 없었다. 학교는 보이지 않는 규칙 속에서 하루 동안에도 다양한 아이들로 인해 예측불가 변화무쌍한 일이 천가지 만가지가 생기는 곳이다. 아이들을 눈앞에 마주하면 없던 힘도 저절로 나 하루가 금방 간다.

 미술 시간 한 아이가 복도에서 그리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래 좁은 교실이 답답한 건 알지.

짝꿍과 함께 얌전히 그림만 그리기로 약속했다. 앞문 출입구 쪽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내 눈 내 눈”

옆반 아이가 새로 산 연필을 들고 화장실 다녀오다 연필 자랑을 한다.

 “넌 이런거 없지. 이걸 던져 네 눈을 맞출거야.”

설마 그러랴 싶었는지 해 봐 해 봐 결국 연필심이 눈을 찔렀고 비명소리가 났다. 옆 반 선생님께 내 반 좀 들여다봐 달라 부탁을 하고 이내 아이를 차에 태우고 안과를 찾아 갔다. 평소엔 잘 보이던 안과가 급하니 찾기 힘들다. 다행히 눈동자를 비켜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어느 날은 뒷자리 아이가 가져온 구슬을 하나 얻어 손으로 던져 입으로 받는 놀이를 하다 그만 구슬이 목에 걸렸다. 또 비명이다.

“내 목 내목! 걸렸어요!”

이건 보건실에 가야겠다. 급히 계단을 내려가던 중 소리친다.

“아악! 삼켰어요.”

또 내 차에 태우고 병원을 찾았다. 비까지 내렸다. 엑스레이를 찍고 의사는 말했다.

“구슬은 위속에 들어가 있어요. 대변에 섞여 나올 수 있으니 며칠 기다려 봅시다.”

안 나오면 수술을 해서 꺼내야 한다는 무서운 말도 잊지 않았다. 아침 등교하면 똥 누었니? 아니요를 며칠 반복하며 태산 같은 걱정을 하던 차 저녁시간에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똥 누었어요. 구슬이 나왔어요.”

 관공서 사무직은 단조롭기 그지없었고 참 편했다. 내 업무에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철저히 나홀로 업무이다. 가끔 관공서에 전화해 문의하면 제 업무가 아닙니다. 담당자가 안계십니다. 하던 경험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 업무가 아니면 답변 불가능이고 설령 답을 하더라도 이는 월권행위가 된다. 내 업무와 옆 사람 업무는 신기하게도 전혀 연계성이 없고 철저한 독립 업무다.

학교는 학년 학급별로 일년 학기 월 주 단위로 운영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맞춰 다 같이 나가야 한다. 어느 학급 하나가 맞추지 않으면 다음 단계 진행이 어려워진다. 시작도 끝도 모두 같이 해야 한다. 늘 시간에 쫒긴다. 교사는 어떤 업무이든 누구나 처리가 가능하다. 방학 때 근무시 내 업무가 아닌 공문이 와도 기한 내에 맞춰 보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공서가 학교에 비해 공문처리 할 일이 별로 없고 시간에 쫒기지도 않았다. 회의도 없었다. 모든 공지는 이메일로 전달 되었다. 학교는 급한 사항 아니면 회의를 통해 전달된다.

관공서의 내 업무 시간은 시간제 계약직이라 하루 다섯 시간 근무다. 출근 시간을 9시로 했다. 이촌역에서 4호선을 타고 출발 사당역에서 갈아타야 한다. 강남 가는 2호선을 타야한다. 와아 이곳에서 여태 보지 못한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 세상에나 이런 고생들을 하며 직장에 다니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구나. 경이로웠다. 존경스럽고 짠했다. 전철 서너 개를 지나친 후에야 겨우 겨우 올라타 사람들 틈 속에 낑겨 둥둥 떠갔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옆 사람에게 물었다. 매일 이러냐고 답은 그렇다였다. 항상 집부근의 학교를 찾아 전보 내신을 내고 도보나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로 출퇴근 했던 나는 가히 딴 세상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출근 시간을 10시로 바꿨다.

지금도 출근 시간대에 전철을 타지 않는다. 부득이한 일을 제외하곤 퇴근시간대에도 안탄다. 가끔씩 등산 가려고 스틱을 배낭에 꽂고 전철 타는 노인들을 본다. 등산을 왜 아침 출근시간대에 나서는지요 물었더니 일찍 가면 하루가 길어진단다.

제발 그러지 마시라 젊은이들 모두 내 자식이다. 그들이 벌어 세금 내니 우리가 공짜로 전철 타는거 아시라. 우리가 사회에 무슨 공헌을 했길래 나이를 벼슬 삼는가. 힘없어 뵈는 여자들 앞에 딱 붙어 자리 내놓으라고 압박 주는 못난 노인이 되지 마시라. 그들도 힘든 일을 하러 가는 사람이다. 손잡이 꽉 잡고 운동 삼아 서서 가시라.

10시 출근은 한결 편해졌다. 한 시간 늦춘건데 승객 수는 십분의 일로 현저히 줄었다. 점심시간엔 도시락을 싸와 같은 실 여직원끼리 먹었다.

“선생님 저 이거 안 먹을래요.”

“식판을 엎었어요.”

“국물을 바닥에 흘렀어요.”

“치킨 더 주세요.”

“쟤가 나를 쳐다봐요.”

학교의 점심시간은 교사의 휴식시간이 아니다. 수업시간보다 더 힘든 급식지도 시간이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던 학교 점심시간에 비해 매우 한가롭고 화기애애했다. 세상사는 이야기도 오가며 즐거웠다. 그러던 중 직원의 반 이상이 계약직이란 사실을 알았다. 월급도 대부분 100 만원 미만이었다. 내 월급은 60 만원이었다. 기간이 만료되면 한참 동안은 빈자리로 있다. 초등학교는 출산 육아 병 휴가 대체 외엔 계약직이 없다. 공무원 칼퇴한다고들 말이 많지만 정규직은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일찍들 출근한다. 계약직은 말 대로 칼퇴다. 정해진 시간 채우면 그냥 퇴근한다. 나도 다섯 시간 채우면 퇴근했다. 회자되는 공무원 칼퇴는 나 같은 시간제 계약직들이 한몫 거드는거 아닐까 생각한다.

 정규직 공무원이 많은 건 나라 살림에 이득 될게 없다. 초임지에선 지금의 교육 행정직 공무원이 하는 서무일도 겸했고 도서관 사서 업무도 했다. 조금씩 일을 더 하면 된다. 나와 같은 날짜에 일하러 온 직원도 계약직이었다. 그는 월급이 지금처럼 작아도 좋으니 오래 근무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사람들은 흔히 약자 편을 들어야한다는 정서가 있다. 비정규직은 약자가 아니다.  정규직은 어찌보면 족쇄가 된다. 쉽게 그만 두질 못한다. 비정규직은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 일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열려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공부의 필요성을 말할 때 좋은 성적은 이담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이 된다고 했다. 운동회 때 달리기 1등만 해도 상을 준다. 수능1등급과 7등급의 아이를 동일 선상에 놓는 건 불공정이다. 인격적으로는 동일선상에 두나 실력차이는 분명 변별이 필요하다. 노고와 인내 성실에 따른 보상은 당연하다. 사회는 다양한 일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좋다고 다 대통령을 할 수는 없다.

잠시나마 정들었던 곳을 기간만료로 떠났다. 같이 점심을 먹던 동료들이 점심시간에 맞춰 놀러 와서 같이 하자 했다.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학교가 그랬다. 매일 다니던 곳인데 다른 곳으로 가라는 전보 발령장을 받으면 순식간에 멀어진다. 다시 그곳을 찾지 않는다. 내 학교는 새로 발령받은 학교이다. 안타깝게도 몇 년 동안 가정사까지 공유하며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을 잃어버린다. 대신 새 학교의 동료들이 금방 그 자리에 들어온다. 전임지와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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