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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와 과실, 그 사이 준고의

by 나니

이번 산불로 인해 내 뇌리를 강하게 때리는 말이 있다. '준고의'. 이 글은 준고의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더 명징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대한민국 현행법상 실수든 고의든 산불을 일으킨 자에게는 분명히 형벌이 주어지지만, 피해 규모에 비해 형량이 가벼울 수 있다. 바로 지금 산불이 그 예이다. 사망자는 발생했고 피해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산불을 낸 사람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형이다. 단, 고의로 불을 냈을 경우에는 10년 이상 징역까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고의'는 법률상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성묘 중 낙엽을 태우거나 쓰레기를 소각했다는 것은 불을 피운 것은 맞지만 고의로 번지게 한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 때문에 과실로 분류된다. 실제로 사망자가 발생했더라도 산불 발화 자체에만 책임이 있고 연쇄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인과관계 입증이 어렵다고 한다.


과연, 그 인과관계라는 것이 정량적으로만 입증되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과실'이란 정말 '실수'의 범주에만 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수는 말그대로 전혀 예상하지 못해야 하는 것이 실수다. 예를들어, 영상 3도의 날씨에 내가 바닥에 실수로 물을 쏟았는데 그 물이 영상 3도임에도 얼어버렸고 그 물을 밟은 누군가가 넘어져 피해를 봤다면 그건 실수다. 영상 3도에 물이 언다는 생각을 어떻게 예측하겠나.


하지만 이번 산불은 인재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초등학생때부터 진절머리나도록 산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조심해야 하고 산에서 불은 산불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배웠다. 초등학교때 산불예방 포스터를 미술시간에 그렸고 뉴스에서 혹은 휴대폰 재난 문자에서도 산불 조심해야 한다고 인지할 수 있다. 고의는 그 결과를 원했거나 혹은 알고 있었음에도 행한 것이다. 이번 산불은 부주의하면 산불로 번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행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과실과 다르다.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불이 날 수 있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있지만 이게 진짜 이렇게 큰 화재로 이어질 줄 몰랐다라는 것은 단순한 변명이다. 이건 과실이 될 수 없다. 산은 평지가 아니다. 산불이 났을 때 소방차가 빠르게 오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예상가능하고 산은 드넓은 초원과 같기 때문에 불이 한번 나면 엄청 크고 빠르게 번진다는 것도 충분히 사전에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을 피웠다. 이는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은 채 알면서 행한 고의다.


고의와 과실 사이에 회색지대가 느슨하게 판단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준고의는 명백히 필요하다. 주의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고, 사전에 위험 가능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했고, 결과가 크고 예측 가능했다면 이는 과실이 아닌 중대한 형사 책임을 물어야 하는 준고의로 봐야한다.


과실과 고의는 형량차이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피해자 나이, 사회적 여론, 언론 주목도, 피해자 태도, 선처 의견서 등을 통해 판사 판단하에 형이 집행된다. 만약, 산불이 발화하고 그날 저녁에 바로 엄청난 비가 내려 빠르게 진화되었다면 준고의는 이렇게 논의되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니다. 준고의는 결과에 따라 등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준고의는 피의자 행동에 따라 등장해야 한다. 즉, 결과가 매우 긍정적으로 나타났어도 피의자 행동이 준고의라면 그것은 준고의로 집행되어야 한다.


준고의에 대한 항목이 신설되어야 한다고 본다. 매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한 초등학생이 산에서 불장난을 쳤다. 그 옆에는 그 부모가 있었다. 불장난은 삽시간에 큰 산불로 번졌다. 이 경우에 초등학생은 준고의 인가? 준고의가 아니다. 초등학생은 발달 단계에서 보면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인과관계 증명을 이제 배워나가는 기준에서 준고의 성립이 어렵다. 초등학생은 정말 큰 산불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위험을 인지할 수 있었다. 부모의 발달 수준은 충분히 예측가능한 수준까지 인지발달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초등학생 자식의 불장난이 충분히 너무나도 당연하게 큰 산불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방치했다. 이는 준고의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준고의를 적용한 해외 사례를 보면 미국에서 한 캠핑객이 금지된 불을 피웠고 이는 강풍에 불이 옮겨붙어 대형 산불이 발생하였다. 수십만 달러 피해를 입힌 이 사례에서 미국 법원은 사고 위험을 인지하고도 행동했다며 무모한 행위로 판단하여 실형과 수백만 달러 벌금을 선고했다.


한국에서도 준고의 유사 적용한 사례를 보면 피의자가 담배를 피우다 불씨를 방치했고 화재 발생으로 번져 이웃이 사망했다. 피의자는 불씨가 그렇게 커질 줄 몰랐다라고 과실을 주장했지만 담배불로 인한 화재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했어야 하기 때문에 준고의 판단으로 중형이 내려졌다.


고의. 고의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은 알면서도 상대방이 피해를 받을 걸 알고 행동한 것이다. 고의는 일부러 하는 생각이나 태도다. 내 행위로 일정한 결과가 생길것을 인지한 상태로 그 행위를 하는 경우다.


준고의. 고의에 준하는 것이다. 일부러 한것은 아니지만 고의에 준하게 일정한 결과가 생길것을 인지한 상태로 그 행위를 하는 경우다. 산불은 준고의다. 고의는 아니지만 고의에 준하게 산에서 불을 피우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로 그 행위를 하였다. 이는 준고의다.


몰랐다는 말은 더이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위험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몰랐다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어른이다. 어른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발달과제에서 볼때 대부분의 발달을 모두 이루었다. 단순히 몰랐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몰랐다는 말로 모든 게 용서되는 나이는 지났고 단순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가진 성인의 의무를 져야 한다. 성인은 심리, 인지, 도덕 발달을 충분히 이룬 상태고 그에 따라 예측과 판단, 선택과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몰랐어요라는 한마디로 책임을 면제해 준다는 것은 성인 존재 자체의 사회적 위치와 책임을 넘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죄를 지었다면 그에 마땅한 형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산불이 얼른 진화되길 바라며 산불로 인해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조속히 피해자들이 일상으로 복귀될 수 있도록 바라며 산불 진압을 위해 힘쓰시는 분들께 감사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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