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정도 정말 순수하게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20대 중반에 만나서 30대 초반까지 연애했으니 긴 장기연애 였고 당연히 결혼도 하겠지 하는 잠정적인 약속도 있는 상대.
서로의 친구를 다 알았고 서로 부모님까지 다 알고 있으며 인사도 여러번 드렸다. 우린 어른들에게 예비며느리이자 예비 사위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언제 청접장을 나누어줘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사이.
나는 주변 말을 빌리자면 인간을 담는 그릇이 아주 넓다고 한다. 바다만큼은 아니지만 이해 역치 자체가 넓고 크고 애지간한 성격이 하는 행동은 다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래서 직업상담사가 잘 맞나? ㅋㅋㅋ
어쨌든, 나는 연애하면서 너를 매우 많이 아주 매일 이해하고 넘어갔다. 네가 내 위에 서려고 할 때도, 네가 나를 억누르려고 할 때도, 네가 나를 상처줄 때도, 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상처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먼저 사과했고 내가 힘들어도 너를 먼저 보듬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존심 부리고 싶지 않고 사랑하는 당신이 웃는 모습만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근데 점점 심해지는 너의 막말과 언행은 점점 내 그릇을 넘치게 만들었고 나는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내 그릇은 네 이기심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이었다는 걸 5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네가 날 절절하게 붙잡고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고 그때부터 노력하는 모습에 결혼 준비도 했다. 하지만, 역시 너는 조금 풀어지니 다시 본성이 나왔고 내 그릇은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네 이기심으로 넘쳐 완벽한 이별을 고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넌 새로운 여자와 연애를 했고 바로 임신과 결혼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기연애 후 이별이 이혼만큼 아프다고 하지만 성인이라면 어른이라면 그 이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아파하고 충분히 직면하고 고통을 탈피 후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넌 아니었나 보다. 거기서 오는 씁쓸함과 아려오는 심장은 널 위한 미련이라기 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순수하게 사랑했던 나에대한 애도이다.
처음엔 네 가정이 파탄났으면 좋겠고 네가 슬퍼했으면 좋겠고 너의 그 무책임한 선택이 네 발목을 잡길 바랬지만, 이젠 진심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 널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에서 한번도 줘보지 못한 과감하고 애틋한 사랑을 주길 바라. 그리고 그 아이를 태어나게 한 네 부인에게도 매일 고마움 갖고 살길 바라. 너 고맙다는 말 잘 못하는데 앞으로 하는 연습 해. 너는 이제 아빠고 가장이고 남편이자 아들이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나와 헤어지고 네 세상이 무너졌든 무너지지 않았든 난 과거일 뿐이고 넌 이제 네 자식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고 넌 힘들어도 지켜야 할 네 책임들을 지니고 살아야 해.
울어도 돼. 아파해도 돼. 슬퍼해도 돼. 후회해도 돼.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해도 돼. 하지만 그래도 계속 앞으로 가. 그럼 점점 힘을 얻을 거야. 앞만 봐. 앞으로 가면 돼. 낭떨어지는 이제 없어. 잘 살아. 나도 잘 살게. 넌 네 마지막 사랑이 맞아. 다시는 할 수 없는 내 모든 걸 미련하고도 순수하게 통째로 준 사랑이니까. 하지만 앞으로 사랑은 더 성숙하고 더 건강한 사랑을 할 거야. 너를 통해 배웠으니까.
너와 함께하면서 힘든 순간이 많았어. 네 이기심을 온전히 내가 다 받아내야 했으니까. 근데 그만큼 행복했어. 너와 함께 했던 여행, 너와 걸었던 길, 잡았던 손, 웃었던 웃음, 같이 마시고 먹었던 시간들. 이제 조금식 흐리게 지울게.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너도 나처럼 흐려질 테니.
가끔 뒤돌아 봐도 돼. 나도 앞으로 가면서 가끔 뒤돌아 볼거야. 그래도 계속 걸어가. 잘 살아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