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있다.
‘center’ ,‘中心’, ‘main’이 아닌, 태어나 살다 보니 결정되어버리는 중간, 가운데.
‘서러움’이라는 단어가 붙어 가장 잘 어울리는 가운데.
샌드위치 토핑처럼 중간에 ‘끼인’ 가운데. 그게 나의 자리다.
아마도 다들, 치킨의 닭다리 얘기는 알겠지.
배고픈 어린 삼 남매는 부엌 찬장에서 컵라면 두 개를 찾았다. 당시 삼 남매였다.
“아싸!” 당연하게 기뻐하는 막내가 있는 반면, 다른 찬장들을 열어 다시 한번 뒤져보고 확인하는 것은 둘째인 나였다. 순하디 순한 언니는 내게 양보하려 했지만, 언니 대신 컵라면을 차지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 장녀인 언니와 장남인 동생이 컵라면 하나씩. 나는 입이 툭 나온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괜찮아. 라면 국물에 밥 말아먹지 뭐.’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정해져 습관이 된 룰같았다.
그 룰을 과감하게 깰 수 있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위로도 아래로도 두 살 터울이었고, 동생 체구가 유독 작아서 ‘언니, 그리고 나와 동생’이 아니라,
‘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의 느낌이었다. 언니와 방을 같이 쓰기도 했고, 동생의 성별이 남자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동생은 쌩글쌩글 잘 웃고, 개구지고 사랑스러웠다. 언니가 책임감 강하고, 얌전했던 것도 첫째이기에 강요받아 만들어진 성격일 수도 있다. 지금도 부모님께 전화 좀 하라며 연락이 올 때면, 내 멋대로 살아온 나와 달리, 여전히 착하고 양보하고 바보 멍청이 장녀 성격 그대로 어른이 된 듯해 미안하다.
어린 명절날의 기억. 친척들로부터 받은 내 자리의 서러움은 더했다.
숫자는 1다음이 2, 2다음이 3이라는 순서가 있는데, 세뱃돈은 1234 순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장남, 장녀가 우선순위였다. 방문하는 집에 따라, 우선순위가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둘째가 첫 순서가 되는 일은 절대 없다. 둘째의 순서는 다음, 그다음으로 계속 밀려나거나, 아무 어딘가 스리슬쩍 들어간다. 호칭도 없다. 늦둥이가 태어나 사 남매가 된 후에는 존재가 더 희미해졌다.
이를테면 “큰딸 장녀, ‘우리’ 장남! 그리고 막내, 막둥이!” 장녀나 장남 이후 얼버무려 스쳐 지나는 어느 한 지점이 내 순서인 것이다. 그렇게 친척 집 순회를 하는 동안, 불만 가득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뭘까?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모두가 갖는 순서 말고, 나를 호칭할 수 있는 말은 뭐가 있을까?
언니는 “이번에 학교 들어가니까...” “이번에 졸업하니까..”라는 모든 스타트를 끊을 때마다세뱃돈이나 용돈이 올랐지만, 나는 동생과 금액을 맞춰주었다. ‘언니, 그리고 나와 동생’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학교를 들어갈 때는 그런 게 없었다. ‘나도 이번에 학교 들어가는데..’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꾸지람을 들을 뿐, 부모님들은 언니가 대표로 받은 것이었다고 이제부터 그런 거 없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언니에게 뭔가를 시키면, 부끄러운 표정으로 나와 동생을 번갈아 보던게 스쳐 기억났다.
용돈이 오르는 대신, 태어나서 처음해보는 모든일에 '먼저' 했을 언니가 얼마나 곤란하고 어려웠을지, 나를 대신해 얼마나 큰 부담을 안았을지, 지금 글을 쓰는 이순간에 처음 깨달았다.
그나저나 당시 돈 때문에 서운 했던 건 아니다. 사라졌던 행사는 ‘우리’장남의 입학에 다시 돌아오고 새로운 스타트를 열었다. 그렇게 또 입술이 삐죽 나와 재작년을 떠올리며 서글퍼한다.
평소, 밖으로 나가는 심부름 형태는 남동생과 해야 했고, 빨래를 걷고 개거나 설거지 등 집안 일손을 돕는 일에는 언니와 묶였다. 이득 있는 걸로 독립되는 일은 없지만, 손을 보태야 하는 일에는 언제나 내가 언니나 동생에게 +1의 부속품이 되는 것이다.
언니에게 대들어선 안 되고, 동생에게는 참아야 되는 둘째. 물론, 이 법은 어른이 있을 때만 지켰다.
어른이 없을 때는 쌓인 억울함으로 언니에게 버럭버럭 대들었다. 지고 싶지 않아 ‘니니 지지’로 언니라는 호칭 없이 최선을 다해 대들었다. 동생에게도 참지 않았다. 몸집이 작은 동생과 온 힘을 다해 싸웠다.
한 대 맞았다 하면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 보여주기 식으로, 베개가 젖어 못생긴 얼룩이 지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언니의 폰에 내번호가 오래토록 '짜증마왕'으로 저장되어 있던 사실은 나만 몰랐던 이야기다.
맞벌이 엄마 아빠의 늦은 귀가로, 울다 지쳐 잠드는 바람에 일러바치기는 무산되고, 잠에서 깨면 허무함만 남았던 기억이다. 왜 그렇게 떼를 썼을까. 모가 많아 아주 뾰족뾰족했다.
그런 깡다구 있던 내 성격이 풀이 죽기 시작한 사건들이 있었다.
“엄마는 어차피 아들 편이야.” 싸우던 중에 남동생이 내뱉은 말이었다.
‘아.. 맞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수긍했다.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에 더는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는 거구나. 동생의 말과 나의 빠른 수긍에 엄마는 충격을 받고, 귀한 장남인 남동생을 크게 혼냈다.
이후,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언니와 내가 아닌 동생에게 설거지를 하게 했다.
"딸들은 시집가면 남의 집에서 실컷 할테니, 우리집에서는 아들인 니가해라."
현 시대로 '시집을 간다' 라는 표현의 선택은 별로지만, 당시로의 엄마는 현명하셨다.
그래서인지, 친척집에서 고모가 언니와 내 앞에 과일과 과도가 담긴 쟁반을 들이밀었을때, 칼질이 어색해 껍질에 붙은 사과속을 동전크기만큼 듬성듬성 썰어낸 우리자매를 보고, "줘바." 하며 보란듯 동생이 나섯다. 동생의 손에서 갓 태어난 뽀얀 속살의 사과와, 마치 피리소리에 춤을 추는 코브라를 연상시킨 사과껍질이, 고모의 기분을 얹짢게 함과 동시에 기가 막히게 만들었고, 나의 마음 깊은 한켠에서는 소박한 쾌감이 느껴졌다. 지금도 퇴근 후 육아를 열심히 돕는다는 동생 소식을 들으면, 엄마에게 들켰던 그 소소한 일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점에 감사하고, 우리 남매에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가족의 새집이 완공을 앞두고, 90프로 진행되었을 때의 일이다.
8살 정도였던 나는, 호기심과 기대에 찬 마음으로 혼자 몰래 그곳을 찾아갔다. 일부 자재와 비닐같은 게 정리 되지 않았지만, 곧 이집에서 살게 될거라는 생각에 신기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 계단앞에서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졌다. '아들'이라는 것은 도대체 뭘까? 마치 내가 아무리 소리치고 날뛰어도, 결국은 넘지 못하는 문턱이 있을 거라고, 위협하는 것 처럼 시멘트 계단에는 그 해 연도의 기록과 다름아닌, 동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가부장제에 딸이면서, 네남매에 장남도, 장녀도, 막내도 아닌, 어딘지 모를곳에 위치한 나의 삶에, 묵직하고 물컹한 액체를 티없이 평평하게 다지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딱딱한 고체가 되기 직전, 막대기로 찔러 넣어 동생의 이름이 아닌, 내이름을 부모님이 새기게 되는 날이 과연 올까? 곧 완공되는 새집이 낡아서 다른집에 살아야 할때가 오고도, 이사가 아닌 집을 지을 확률은?
다음, 그다음도, 어쩌면 영원히, 차례가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가능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가슴에 새겨졌다. 이는 나의 부족함이 아닌, 부당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