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 책상에 앉아 빗소리와 함께 가을바람이 피부에 닿으니, 미뤄뒀던 시나리오 퇴고가 잘 된다.
좀 전까지는 그랬다.
분명 내 손은 시나리오 퇴고 중인데, 왜 마음은 뭉클뭉클한게 자꾸만 설리가 떠오를까.
설리가 보고싶어 사진들을 뒤적이다가, 설리에 대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시나리오 퇴고를 다시 미루고 새창을 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나가서 비를 맞고 싶다.
얄구진 일회용 우비 속에 백팩을 메고, 대여한 자전거로 뻥 뚫린 도로 위를 달리며,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10년정도 지난 제주도 여행의 시원한 기분은 어느새 희미해져가고 있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포기할 수 없는, 아마도 당시 필요한 걸 가득 담았을 백팩에는 뭐가 들어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인지 긴 여정에 의미 없는 많은 것을 이고 지고 사는 것 같다.
나와 함께 비를 맞아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은 그때의 자유롭던 그도, 이제는 회사 책상 앞에서 타이레놀을 먹고 퇴근 후 술 약속을 갈까말까 고민하고 있는 어른이 되었겠지. 우리는 언제부터 본능을 최대한 자제하고 숨기며, 남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는 걸까?
비를 맞기 전부터 젖어서 무거워질 옷이며, 현관부터 거실을 지나 욕실 앞까지 떨어뜨릴 물기, 씻고 닦고 말려야 할 번거로움, 비 한 번에 탈모걱정과 감기가 뭐 그리 대단히 차지해서 심심찮은 우려에 휩싸이는 걸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게 참 안타깝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망설임 없이 나와 함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갈 누군가 있다면 좋겠지만, 납득되야 할 설명과 이해, 이유. 또는 감정의 착각, 기대나 보상, 책임에 대한 관계 등이 번거로우며, 인간이기에 결국 말을 해야만 한다는 지긋지긋함이 충분히 나를 자제시킨다.
그냥 이유없이 혼자서도 빗속으로 뛰쳐들 용기, 가진 것을 흠뻑 적시고도, 얼굴로 비를 맞고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설리에게서 보였던 거 같다.
그다지 이상하지도 잘못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내가 설리 팬이라고 자부 할 만큼 설리를 위해 행동한 건 없지만, 방송이든 기사든 틈만 나면 공개적으로 도마 위에 올리고 구석으로 몰아넣는 게 불편하고, 남의 인생을 왜 이렇게 들쳐서 뒤적이고 흐트러 놓으며 오지랖들이지? 마치 내가 당하는 것처럼 화가나고 수치스럽고 속상했다.
그냥 제발 가만히 좀 놔뒀으면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다 짜증마저 섞이던 때쯤,
한 순간에 모든 걸 놓아버리고 알 수 없는 경지로 날아가버린 그.
마치 무인도에서 겨우 살아나고 가라앉고 살아나기를 반복하며 제발 잘 피어나길 간절히 숨죽이고 바라보다 어렵사리 피워진 소중한 불씨에 어! 하고 기뻐하려던 찰나, 투척한 모래에 한순간 꺼져버려 어두움에 파묻히는 공포와도 같았다.
"죽었대!"라고 외치는 세상이 끔찍해 구역질이 나고, 되돌릴 수 없음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원망과 죄책감, 절망감에 따라 죽고 싶었다.
이 슬픔과 절망감은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보는 것도 괴롭게 만들었다. 마음이 많이 갔던 설리는 우혜미의 '꽃도 썩는다' 를 듣고 들으며 추모하던 때, 외로웠을 종현의 슬픔에 잠겼던 때, 배우 이은주를 잃었을 때 까지도 거슬러 올라갔다.
세상은 무섭도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짓밟았다. 감히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을 쓰자면, 거짓으로 사는 겁쟁이들이 스스로를 그대로 보지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 틀리지 않았어.' 를 마치 증명받고 싶은 듯 진짜 순수하고 자유롭고 용기있음에 놀라 "넌 틀렸어!"하고 반박하는 모습같다.
그가 떠난지 1년이 지나고 맞이한 어느아침 문득 그의 맑은 미소를 보며, 살아있었구나.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구나. 내가 1년가량 아주 나쁜 악몽을 꾸었구나. 꿈이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눈물이 났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믿고싶지 않았고 때를 써서 되돌릴 수 있다면 아주 진절머리나게 때를 쓰고 싶었다. 그럴때면 스스로 이렇게 괴로울 만큼 설리를 좋아했었나?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도 삶에 바빠 누군가의 팬이 되어 움직이진 않았지만,10년 전 쯤 쓰다 방치해뒀던 컴퓨터를 처분하려고 연결하고는 깜짝 놀랐다. 모니터 바탕화면에 전도연, 아오이유우와 함께 동그라미 방울을 귀에 달고 앳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기고 있는 fx 데뷔시절의 설리. 팬 활동은 안했어도 내가 오랜시간 그의 삶을 애정 갖고 봐오고 있었구나. SNS에는 여전히,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그를 그리워하는 사진들과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칠흙같이 캄캄한 세상에 용기있는 소중한 불씨같은 존재를 잃었다는 게 너무 암담하다. 지금도 너무나 보고싶고 설리의 용기와 자유를 내내 멋있어 부러워했고, 힘이 되었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