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짝사랑
놀이터는 탄성고무보다 흙이 좋고, 공은 숨으로 동그라미를 채워 튕겨지고 굴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무 중에는 버드나무를 가장 좋아하는데, 바람결에 살랑이는 잎줄기 사이 새어 나오는 햇빛이 반짝거리는 게 바다, 호수 위의 윤슬, 또는 깨져서 아픈 유리조각들을 닮아서다.
아마도 나는, 누가 봐도 빛인 줄 아는 언제나 당당한 한낮의 태양보다, 지나가는 소중한 찰나의 시간,
강열하고 섬세하게 부서지는 빛 조각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다.
“사랑해”란 말보다, 흥분의 쾌락보다 조심스러운 긴장감, 스며드는 설렘, 배려담긴 다정함,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포옹, 무언가 전달하는 깊은 눈 맞춤, 느린 입맞춤이 좋고, 때로는 슬픈 마음을 공유하는 것, 어려워 어쩔 줄 모르는 폭풍 같은 마음에도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게 ‘살아있음’이다.
고요한 정물의 빛과 그림자를 살피던 서양화에서,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애니메이션과로 전향했다.
실사 같지만 실사가 아닌 혼란을 주는 3D보다는, 어설프게 삐치고 손의 힘과 속도가 보이는 2D작화를 좋아했다. 보편적이게 말해 레트로, 아날로그를 좋아하는데, 요즘의 트렌디한 레트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보태어 가난하거나 더러운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듬어지지 않아 시간이 담긴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다.
취향이 워낙 확고한 편이라 회사 입사는 1퍼센트 계획도 없었다.
그래서 넌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으면, 질문에 이미 직종을 정해야 하는 게 불편할 정도로 내 속에서는 ‘창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또 구석으로 좁힌다. 그래서 ‘어떤’ 창작? 어린 날에는 이 답을 내리는 데에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나는 글도 그림도 애니메이션도 심지어 광고아이디어, 의상디자인이라 할지라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사회는 나를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 이라는 말로 돌려주거나 돈이 안 된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수긍하지 못했다. 인생이 한 줄이면 이것도 저것도 시도해 보며 스스로를 찾아가야하는 거 아닌가?
이것도 저것도 하고싶고 천천히 다 할 수 있다면 해도 되지 않나? 내 사고나 메시지를 담는 창작에 있어서 표현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걸 알아챘다. 단 하나의 방법을 선택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선택한 것을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욕심 가득한 나는 예술 표현의 범위를 좁히고 싶지 않았고, 당시 종합 예술로 보인 영화라는 장르로 뛰어들어, 영화 미술 스태프로 8년 일했다. 화를 내지 않는 리더의 길을 이상으로 두었지만, 온갖 다그침과 화살이 나에게 오는 것을 튕겨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받으며 끝내 감당하지 못했고, 창작적으로 표현하고자 함은 해소되지 않은 채 불행을 견디는 나를 마주했다. 나에게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고 말해주셨지만, 산 너머 앞서 가고 있는 모습에서 밝은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적신호에 브레이크가 걸린 2020년 여름, 독한 마음으로 전략을 갖고 산을 넘을 것인지, 우회할 것인지. 어긋난 지점을 짚고 넘어가기 위해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어째서 이곳으로 흘러왔을까?
문제의 회로가 향하는 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우선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머릿속 빼곡한 말들을 무작정 쏟아내면서 글쓰기의 걸음마가 시작된 것이다. 직접적으로 쓰지 못한 일부는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시켰다.
shoot sign에 숨을 죽여야 하는 일원이 아니라, 직접 운전대를 잡자. 영화 연출로 복귀를 꿈꾸며 내 손끝에 숨을 불어넣고 집중하고 문을 두드렸다. 의구심 속에서 외로운 마라톤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무엇에 이렇게 목메고 있는 것일까? 영화, 예술, 또는 창작과 표현. 그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지만,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것이다. 기준이 높은 것일까? 내가 인정욕구가 강한 것일까 생각해 보며, 넘어지고 넘어지면서도 나를 일으키면, 여전히 쓰고, 그리고, 만들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때 남은 하나의 미련은 결국 창작이다.
이것은 다른 관점으로 보는 재미에 중독되었거나, 흘러가는 것을 담고, 남기고 싶어 마치 유서를 쓰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미 죽었거나, 늘 죽음에 가까이 있어 무언가를 살리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올해 2월, 10년의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연고가 없는 경기도 남쪽으로 이사를 했다.
낯선 사람들에 다가갔고, 약속을 잡으면서 자연스레 편식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상상만 해도 닭살이 돋는 더위 사냥 아이스크림을 제외하고, 불호 레벨이 높은 홍어와 비주얼 극복에 실패한 마라룽샤를 ‘아직은’ 먹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먼 훗날, 홍어 맛집 도장 깨기와, 양손으로 마라룽샤를 뜯어 먹는 나를 상상한다.
가족들이 잠든 시간에 친구들과 밤낚시를 하려고 산에 있는 저수지로 나섰던 어린 시절부터, 수능 점수 없이 예체능으로 서울로 내던진 20대며, 당장 눈앞의 일도 예상할 수 없는 영화 스태프로 떠돌며 살았던 긴 시간, 돈 벌기를 뒤로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내 모든 삶이 무모한 방황이라면 방황이다.
위태로운 내 인생을 보고 있자니, 주변에서 삶의 방식을 알려주려 나보다도 더 발을 동동 거린다.
30대 중반, 그리고 노후대비, 그런 말을 들으면 당장의 대비도 못하는데 노후 대비가 무슨 소용인가?
허무하게 끝나는 인생들을 접하면, 이렇게 살고 있는 내가 노후에 살아있긴 할까?
살아있다면 그때는 그 이후를 대비 안 해도 되는 걸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못 먹던 음식들도 맛있는 집에 가면 웬만해선 다 맛있게 먹게 되더라는 것이다. 뭐라도 하다보면 어느새 뭔가 해놓은 게 있을 때도 있더라.
마음을 열면 그 마음이 너무 커서 놀랄 것이라고 했다.
낯선 것에 두려울 것이 없다. 스스로의 가능성은 스스로 열어가는 것이다.
외로운 마라톤의 침체는 불안 노트를 작성해 2022년, <낮과 밤>, <망각의 재발견> 미술 전시로 나를 허락하고 토닥여주었다. 코로나 지원금으로 끊은 3분 거리의 헬스장은 실패했지만, 햇살 아래 초록 잔디구장을 숨이 차게 달리며,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공을 뻥 차는 행위는, 드디어 내게 바람을 불어넣고 몸뚱이를 흔들어 깨우는데 성공시켰다. 50kg가 되 본 적 없는 모태 마름이라, 늘 할 수 있겠냐는 무례한 걱정과 보호의 늬앙스를 받아야 하는 불편함에 사실은 코웃음이 나올만큼 누구한테도 뒤처지지 않는 뜨거운 열정의 나를 다시 마주했고, 한 번 더 빛나는 세상으로 내던져 질 준비가 되었다.
포기는 나른하고, 나가떨어지는 것도 용기가 맞지만, 무모한 시도보다 두려운 것은 무난한 일상에 익숙해지고, 풋살이 나의 열정의 전부를 해소시킬까 봐 더 두렵다.
끌어 모아지는 지금의 에너지로 가보지 못한 길로 모험을 떠나 살아있음에 숨 쉬며, 다양한 표현을 통해, 남들이 서있는 줄에서 이탈하는 나의 삶이 튀어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살기위한 간절하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 이해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