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가량의 긴 탈색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탈색 헤어에 그때그때 끌리는 색을 입히는 걸 좋아해서 커트가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짧아진 김에 귀가 보이도록 더 짧게 잘라 보고 싶었는데, 첫날은 거울에 스친 낯선 모습을 외면하고 미용실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왔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다가 벽 전체를 차지한 거울 앞에서 멈춰 섰다.
물이 엎질러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서 귀밑 3cm 숏 단발을 했던 내게 과거 사진의 긴 헤어스타일을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도 그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우리로 지내는 내내 나는 긴 헤어스타일이였고, 첫 만남의 귀밑 3cm보다도 짧게 바리깡으로 밀어버린 목덜미의 까까머리가 낯설어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적응해야 하는 7년의 이별.
뒤통수 모양에 자신이 없으니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짧은 헤어스타일로 기록되지 싶다.
어느새 자리 잡고 인생머리 인가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미용실 담당 헤어 선생님도 생겼다.
긴 헤어스타일도 예뻐 보이고 좋지만, 관리가 어렵고 간지럽고 귀찮고 무겁기까지 하다.
짧은 머리는 아침마다 폭탄을 맞아서 '아, 그래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들 나오는구나.'를 알아챘다.
샤워는 5분에 가능하다. 외출 준비 TV보다가 5분이면 가능하다.
영화 프로젝트가 끝나고 피부가 뒤집어져서 여름 내내 그러다 지금은 여름부터 화장 대신 스킨로션, 선크림만 발랐다. 집 앞 편의점에 최소 눈썹이라도 그리고 나가던 난데 신기했다.
기름 낀 느낌이 들 때마다 수정화장 대신 언제 어디서든 물 세수가 가능했고, 피부가 엄청 좋아졌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첫마디로 "왜 남자가 됐어? 먼 일 있냐?"란 말을 던져서 당황스러웠다.
일하면서도 "야, 머시매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머시마 같냐?"하는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나만큼 귀여운 남자애는 안 보인다. 박지훈 같은 남자 아이돌 같다는 말을 하는 건가?
주근깨도 잘 어울리고 아이라인이 없으니 훨씬 동안이다. 립 정도 꾸안꾸 하나로 버티는 중.
올리브영에 가도 딱히 살 물건이 안보인다. 탈코르셋이 목적은 아니었고, 원피스도 여전히 좋아하고 머리카락도 기를 생각 있지만, 지긋지긋하던 눈치 보는 삶에서 조금은 벗어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 되는 인연을 좀 끊어냈다. "웃기다. 멋있다. 역시 믿음이 간다. 재밌다. 매력 있다." 라는 말을 일하는 중에 수시로 듣고 있다. 심지어 에니어그램 결과도 혼란해한다.
내 우울감이 누구보다 건강해서임을 알게 되었다.
전주, 다들 자고 있을 휴차 아침, 혼자 7시 조식을 챙겨 먹고 40분 버스 타고 나가서 드디어 영화<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숨죽여 우는 대신 실컷 울었다. 독소를 빼는 것처럼 후련했다.
-2019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