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심했나? 지하철 안 문 앞에 바짝 붙어 소곤소곤 유치하게 납득할 수 없는 고작, 그깟 결혼에 대한 반박으로 서로 기분 상한 채로 끝이 난 아빠와의 통화 내용이다. 어딘가 모임에서 부모의 결혼 압박에 대해 눈치 보인다는 대화 주제가 나오면 통화 내용을 기반으로 '이렇게 반박했더니 이젠 잘 안 해. 해도 내가 귓등으로도 안 듣지만.'이라고 방법 아닌 방법을 꺼내곤 한다. 물론, 관계가 부모와 자식이기 때문에 자랑은 아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정말 납득이 되지 않고 화가 한다. 아빠의 손재주를 닮아 손으로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건 나, 그다음으론 언니가 잘하는데도 아빠는 자신의 업을 딸에게 물려줄 생각은 전혀 못하는 것.. 아니, 하지 않는 것 같다. 물려준다 해도 할 생각은 없지만,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한다!
상한 기분은 잠시 옆으로 젖히고, 지금 쓰고자 하는 주제는 결혼도, 남아선호사상도, 효도도 아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서 어마 무시한 이동을 하는 누떼, 그 누떼들을 떠올리면 불안감이 든다.
그게 아니면 어느 특정 불안감이 들 때, 그 누떼들이 떠오른다.
누떼의 불안이란?
'누 한마리, 한마리는 대체 어느 누를 믿고 따라가는 걸까? 앞에 옆에 또는 건너 건너 앞?
또는 양옆과 뒤에서 속도와 간격을 맞추어 달리는 누떼에 멈출 수 없어 떠밀려 달리는 것은 아닐까?
선두라인에 달리는 누 한마리는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고, 본인을 온전히 믿으면서 거침없이 땅을 내딛어 수많은 누들을 이끄는 걸까? 확신을 하는 걸까? 누들에게 믿음을 주려고 강한척 애쓰고 있는건 아닐까?
이 문장의 포장을 뜯어 다시 써보자면, 누들을 믿게 하려고 뻔뻔하게 속이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다.
누떼 속도에 치여 옆으로 나가떨어진 누 한 마리가, 그 자리 그대로 죽은 듯 멈춰있다가 천천히 먼지를 털며 일어나 모래바람을 휩쓸고 저 멀리 떠나가는 작아진 누떼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누떼 뒤를 쫓아가기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주변엔 뭐가 있는지, 산뜻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저 좁은 샛길엔 뭐가 있는지 호기심을 갖고 기웃거리며 다른 길로 가보는 상상을 만들고 나서야 누떼를 벗어나도 괜찮아. 그게 그렇게 위험한 것만은 아니라며 불안을 덜고 안심할 수 있는 것 같다. 누떼와 비슷한 남들, 보통의, 일반의, 평균의 사람들, 대중성에 속하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여러 사람과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왜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그러면 사수가 말한다. "그냥 하는 거야. 나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계속 해온 거니까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해."
'왜...' 왜를 쓰다 보니, 고등학생 때가 스친다. "다홍색에 흰색을 섞어서 살색을 만들어." 물감을 섞으며 설명을 하던 미술 강사 선생님께 질문했다. "왜요? 왜 다홍색과 흰색으로 살색을 만들어야 해요?"
그리곤 속으로 생각했다. '갈색에 물을 많이 타고 노란색을 약간 섞어...'
선생님은 그런 나를 잠시 노려보며 장난치지 말라며 플라스틱 컵을 엎어 머리를 콕 때렸다.
동양인의 살색이자 살구색을 만드는 방법은 두어 가지가 더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그 방법을 쓰라고 했는지 궁금했을 뿐, 대들거나 장난칠 생각은 아니었다.
장기 프로젝트 상사는 말을 덧붙였다. "너 마음대로 할 거면, 너 혼자 하는 일을 하러 가."
그 말은 꽤나 해결 방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떨어져 나가는 용기.
어릴 때부터 남들이 말하는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 4를 좋아했고, 행운의 숫자 7을 좋아하지 않았다.
짝수인 2보다 홀수인 1을 좋아했고, 가득 찬 10보다는 부족한 9를 좋아했다.
여자 색, 남자 색을 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래도록 분홍색을 질색했고, 지금까지도 붉은 웜톤보다는 푸른 쿨톤을 좋아한다. 이런 청개구리 심보는 튀는 행동을 한다든지, 관종이냐느니, 4차원, 12차원이라든지, 컨셉 충이라느니 많은 꼬리가 되었다.
그런 꼬리를 달기에는 주목받으면 얼굴이 빨개져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를 해야 될 때나 교실 앞으로 나가 노래 부르는 시험이 있으면, 가슴이 요동치고 손에는 지우개를 꼭 쥐고 있는 내성적인 아이였으며, 인사치레 식사 자리에서는 거의 먹는 척에 가까울 정도로 소량의 음식만 소화할 수 있고, 불편한 사람과 마주해야 되는 자리에는 청심환이 필요하기도 한 낯가림 심한 어른으로 자란 극 내향형 인간이다.
나의 청개구리 심보는 비 오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는 좋아하던 비를 더 좋아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저 미움받고 소외당하는 것에 관심이 가고 마음이 쓰이고, 뭐든 공평하게 나누고 싶었던 거 같다. 어쩌면 그래야만 내 몫도 챙길 수 있겠다는 안심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런 이야기를 쭉 늘어놓는 데는 아주 단순한 긁힘에서부터였다.
'병'이라는 단어가 가진 느낌은 어떠한가? 병은 아픈 것을 말하는 건데, 사람 이름에 병을 붙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본인의 이름에 병을 붙여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그러고는 피식, 또는 배꼽을 잡고 웃음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서울 어느 동네에 '병'을 붙여 부르는 곳을 혹시 아는가? 예술인 병을 들어봤는가? 홍대병이라니.
대다수의 사람이 이런 말에 쉽고 빠르게 공감을 하고 소통이 되는 것에 있어, 그 반대말은 직장인 병인가? 정직원 병? 평범한 병? 보통인 병? 이상하지 않음을 해명하려는 병? 억지로 만들어 보며 인상 찌푸려지는 걸 봐서는 내 안에 피해의식이 솟고 맞서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뜻.
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는 다수가 다른 패턴으로 살아가는 몇 소수에서 읽히는 공통 패턴을 발견했을 때, 병이라 묶어 대하는 악(惡)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것을 꼬집고 싶다.
학습된 언어나 전형적인 글 외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시도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익숙한 틀을 깨는 시도를 하며, 그런 표현으로 사랑받기도 하는 사람들인데, 학습 언어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이해받기 위해 언어로 전달하는 인터뷰에서 헝클어짐을 정리하는 시간의 뜸 들임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 어눌하다. 또는 마약을 한 것 같다'라는- 즉, 대중들이 내뱉는 학습언어의 순서와 속도대로 말하지 않는 것을 문제가 있는 걸로 프레임을 씌우는 것을 보며,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사고를 어떤 적합한 단어와 문장의 선택을 골라 전달해야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해 받을 수 있을까? 듣는 사람이 들을 인내와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살피며 꺼낼 수 있는 범위를 정하는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속상했다.
속상한 마음으로 자연스레 보통의, 일반의, 대중과의 부딪힘에서 언제나 바닥에 그어진 그 선 너머 반대 측에 서있는 조금 더 선명해지는 나를 마주하기도 한다.
대중적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픈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다름일 뿐이고, 누떼를 벗어난 다른 방향에도 알 수 없을 길이 있음을 수많은 누들로 부터 이해받길 바라고, 누떼 속에서 나와 같은 불안을 겪고 있는 청개구리 심보의 누가 있다면 떨어져 나가는 용기를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