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라고?!! 얼마?!! 왜 그렇게 목소리가 작아?! 엄마, 용돈 주세요. 당당히 말을 하면 되지, 왜 안 되냐고 물어?!! 얼마?”라며 큰소리 쳤다. 그러면 나는 더 작은 목소리로 “아니에요.” 하며 금방 포기해버리고 뒤돌아서 서는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그러면 나를 마치 등신같이 보는 표정의 엄마가 용돈을 건네면서 -
“그리 목소리가 작아가지고, 학교에서 발표는 하냐?!”라고 하셨는데, 조금의 반박도 할 수 없게 학교에서 번쩍 손들어 발표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없었다. 용돈을 달라는 말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용돈 준지 며칠 됐다고 또 용돈?!! 안 돼!” 하고 거절하는 날이면,
셋째 동생처럼 애교를 부리거나 지킬 수 있을지 모를 집안일을 약속하며 얻어내는 능청의 능력은 없었다.
언니도 내 목소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개미 친구의 친구쯤 되는 귀여운 목소리였지만, 우리 집에서 그나마 공부를 잘했기에, 아침 등교 때 급하게 “엄마, 나 샤프심 사야 돼” 하면 천 원짜리 한, 두 장은 그냥 쉽사리 얻어나갔다. 나는 언니의 그 기술에 재빠르게 “엄마, 샤프심 300원밖에 안 해!” 또는 “엄마, 언니 어제도 샤프심 산다고 했어.”라고 덧붙였지만, “으이그, 쫌!”이라는 짧은 표현으로 ‘언니는 너랑 달리 공부하는데 필요한 돈이 많아 잠자코 있어.’ 정도의 뉘앙스를 내게 넘겨줬다.
이후 어느 날 은근슬쩍 언니의 기술을 베껴 “엄마 나 지우개!”를 시도해 봤지만 "방 치워! 지우개가 수십 개 나온다!" .... 어설프고 형편없는 커닝으로 방 청소를 얻는 게 현실이었다.역시나 구시렁.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는 언니의 표정에서 ‘메롱’을 본 것 같은 기억은 기분 탓일까?
어느 날, 닫힌 안방에서 엄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거는 자존심이 세 가지고, 용돈 안 준다고 하면, 굶어죽어도 돈 달란 소리 안 할 끼다.”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자존심? 나는 자존심이 뭔지도 몰랐을 나이였지만, 한번 삐지면 절대 손 벌릴 생각이 없었던 건 맞다.
그땐 식탐도 없는 편이어서 그냥 버틸 수 있을 만큼, 굶을 포부도 대단했다.
그게 어른들이 말하는 자존심이었고, 마치 그 자존심을 증명하듯 머지않아 고등학생 때였다.
거리가 엄청 멀진 않았지만 나름의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게다가 엄마가 횟집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죽을 세라 용돈을 많이 주셨는데, 바짝 가깝게 지낸 단짝이라는 존재가 생기면서 충동적으로 놀러 가는 일도 많았고, 돈 개념이 없어 급 약속에 당일 입을 옷도 쉽게 사고, 떡볶이도 당연하게 사먹는 등 받은 용돈을 받은 족족 써버려 남겨둔 돈이 없었다. 용돈 준건 다 어쨌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서 다가온 수학여행 비용이 필요하다고 엄마 아빠께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쯤 집안이 심각한 분위기여서 그런 말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수학여행 비용이 아니라, 수학여행 때 입을 새 옷 살 돈이 없었던 것이고, 더 정확하게는 철부지가 스스로 새 옷을 갖고 싶은 것보다 평소 입던 옷을 입고 수학여행에 가게 되는 모습을 친구들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게 컸다. 그깟 겉으로 보이는 게 뭐라고, 철판의 용기로 작용했다.
“18살이고, 163입니다.”
당시 횡단보도 부근에 꽂혀있는 *벼룩시장(지역신문) 부록의 구인구직 페이지를 훑어 보며, 나이제한이 없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아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넘어 내게 나이와 키, 부모님께 허락받았냐는 세 가지 질문만 하고 그 자리에 선채로 바로 합격을 시켜줬다. 성인의 키라 통과되었지만, 나이는 숨겨야 하는 분위기였다. 마지막은 당연히 “네.”라는 단 답의 거짓말을 뱉었다. 그 한마디 대답으로 결정이 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으니까.
순진하게 생겨서 거짓말이 가장 잘 먹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말이 농담반 거짓말이 반이라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9시에 문을 여는 치과를 갔다가 등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선생님한테 전화를 하고 다시 잠에 들곤 했다. 비슷한 수법의 지각으로 사랑의 매를 맞는 게 일상이 되고, 때릴 때도 없다며 선생님께서는 매를 들어 힘을 빼는 대신 선생님 책상 주변 청소를 시켰고, 나중에는 그 선생님께서 모닝콜까지 해주셨다. 의외로 뻔뻔했다.
또 한 번은 야자 시간에 실기 실 가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당당한 거짓말을 하고 실기실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갑자기 실기실 문을 연 선생님, 진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아닌지 마주친 찰나의 눈싸움에서 거짓말인 걸 걸렸지만, ‘너는 적어도 사고는 안치니 확인 안 하고 봐준다.’의 느낌을 받은 뒤 문을 닫아주기도 한 선생님.
내 담임을 맡아주셨던 다른 두 선생님들인데, 감사하다.
모쪼록 다시, 단기간 동안 하기로 한 아르바이트를 위해, 어느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성숙해 보이려고 간단한 화장이라며, 피부화장을 할 줄 모를 때였기에 눈썹을 그리고 립을 발랐고, 약속한 시간이 되자 길가에 세워진 봉고차로 올라탔다.
옆에 앉은 모르는 사람들, 주로 엄마 나이대의 여자 어른들과 뉴스에 실릴법한 의심쩍은 분위기 속에서 어딘가를 한참 갔다. 겁도 없었는지, 겁이 났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행히 뉴스에 실리는 일은 아니었다.
미친 듯이 인파가 몰려드는 명절 기간의 군것질거리를 파는 휴게소 일이었다.
그나마 키가 어른인 나는 일명 ‘야판’이라 부르는 야외 판매대에서 고구마튀김, 포장어묵, 은박지로 싼 한 줄 김밥 등을 판매했다. 물속에 담겨있는 포장어묵을 건져내는 것은 굉장히 뜨거웠는데도, 손님들은 더 뜨거운 걸로 바꿔달라고 했다. 수학 울렁증은 심했지만,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 잘하면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 없다는 현명한 엄마의 가르침 덕에 돈 계산은 꽤 잘했다.
또래의 키가 작은 애들은 주방 안에서 주방보조나, 건물 뒤쪽의 청소 등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곳에서 일했다. 밖에서 판매를 하는 게 책임감도 있어야 하고, 체력적으로 힘은 들었지만, 첫 아르바이트라서 인지 마치 어른이 된 것 같고 장사꾼 역할놀이마냥 재미부분으로는 ‘훨씬’이라고 말하고 싶다.
옆에 아주머니가 화장실로 자리를 비우면, 긴 소시지에 칼집을 내고 데워서 케첩을 뿌려 팔고, 통감자도 적당히 담아 팔았다. 나를 뽑아준 담당 매니저님이 안 계실 때면, 야판 여기저기서 ‘지금이다.’ 싶은 은밀한 눈빛에 거래가 오갔다. 누구는 슬러시를 짜서 넘기고, 옆 아주머니는 통감자를 넘기고, 소량 바꿔 맛보기를 했다.
주변에 너무 많이 말해서 닳을 만큼 닳은 이야기지만, 그중 최고의 조합은 뜨거운 통감자 위에 차가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짜서 같이 먹는 것이었다. 입안이 차갑고 녹으면 곧 뜨거워지는 부드럽고 신기한 맛이었다.
지금 먹어도 그 맛이 날까 궁금하다.
여행을 가다 보면 보이겠지만, 휴게소 주변은 온통 나무와 풀들, 논 밭 강변이다.
그런 어딘가에 덩그러니 휴게소 숙소가 있었다. 낯선 언니들, 아주머니들과 섞여 잠을 잤고 일하는 시간대가 조금씩 달라 다양한 시간에 여기저기서 알람이 울렸다.
아침잠이 많아 담임선생님의 모닝 콜로 깨던 내가, 18년 인생 최초로 일찍 일어나는 때였다.
해가 뜨기 전 캄캄한 길을 혼자 나섰고, 굴다리 밑으로 난 샛길로 공포에 떨며 걸어가다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신 건지 파지 리어카 할머니와 마주쳤고, 리어카의 오르막길을 도왔다.
겁에 질려 나 살기도 버거울 때 남을 도왔다는 게 뿌듯했는지 기억이 오래 남아있다.
그렇게 휴게소에 무사히 도착하면,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거의 7시쯤부터 밤 11시, 늦으면 새벽 1시에 끝나,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야외 판매대에 서있어 다리가 부을 정도로 부지런 떨며 악착같이 버텼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도 쉬워 보이지 않았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10대 청소년들이었다.
큰 파라솔 아래, 아이스크림 냉장고 안에 담긴 캔 음료수를 발랄한 목소리로 호객하며 팔고 있던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들, 매니저 아저씨를 포함한 어른들과 차분하고 능숙하게 대화하는, 새하얗게 염색한 일명 폭탄머리의 또래 여자애, 뭐가 그렇게 10대 학생들을 혹독함 속으로 밀어 넣었을까.
어느 오후, 당시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가 친척 집으로 가는 길에 부모님께 말도 안 되는 거짓말과 고집으로 별것도 아닌 고구마튀김을 사러 왔다. 들려줬다는 거 자체가 재밌고 고마웠지만, 마음이 녹을 만큼 여린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삶의 재밌는 경험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제사도 꼬박꼬박 하는 집안이었음에도, 명절에 집에 가지 않을 만큼의 반항기가 가득했고, 앞으로의 내 삶을 스스로 해내겠다는 굳건한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바쁘게 하루들을 보내는 중, 또 한 명의 익숙한 얼굴, 엄마였다.
지금도 의문인데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생각 못 한 플랜이라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고, 뒤늦게 어묵 줄까? 고구마스틱 줄까? 하며 뭐라도 줘야 할 것 같은 상태로 붉어지는 눈시울을 들킬 까봐 눈을 쉽사리 마주치지 못하고, 때마침 온 다른 손님 계산을 버벅였다. 그 모습이 바빠 보였는지 수고하란 말을 남기고 가시는 뒷모습이 어렴풋 그려진다.
어쩌면 다녀간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일까? 이제 와서 그게 뭐 중요할까, 엄마와 마주한 그 당시 기분을 풀어보면, 사고도 안치고 말없이 지내면서도 속으로 가지고 있던, 집을 등진 나의 뜨거운 반항심을 들킨 느낌이라 떳떳하지 못하고 죄지은 기분이었던 거 같다. 나는 이때를 시작으로 30대 중후반인 지금도 여전히 명절에 집을 가지 않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고작 4일 정도의 고된 시간이 끝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컨테이너 사무실에 일당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정확하진 않지만 3500원 정도의 시급이었고, 야간근무, 추가시간 지급금까지 잘 못 계산된 500원인가, 1500원인가를 야무지게 말씀드리고 받은 인생 첫 급여가 꽤 짭짭한 금액이었다.
나는 내가 처음 번 돈으로 친구들과 브랜드 옷 가게에 들러 옷을 샀다가, 금액 대비 무난한 디자인의 옷이 아까웠는지 결국 다시 돌아가 환불했고, 보세 가게에서 소신껏 마음에 드는 옷을 사서 수학여행을 떠났다.
아르바이트 급여를 받은 후 마지막 식사시간, 멀찌감치 떨어진 맞은편 테이블에서 밥을 먹으며 뜨문뜨문 나와 눈이 마주친 하얀색 폭탄머리 친구가 식사를 끝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앞에 다가와 앉았다.
너무 힘들어 도망치듯 명절 단 기간 휴게소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내 모습은, 그곳이 일상인 친구들에게는 제일 사연 없어 보이는 신기한 이방인이자, 엄살 부리는 온실 속 화초일 뿐이라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 친구는 나와 동갑내기였고 한 번씩 오라며 친해지고자 내게 메신저 아이디를 써주었다.
뭐랄까. 온실 밖으로 나온 걸 환영해 주는 느낌?
한창이었던 싸이월드 방명록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그 친구는 내가 생각한 날라리나 반항아는 아니었고, 미용사의 꿈을 위해 사회에 일찍 나와 있는 자립심이 강한 친구였다. 이후 더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온실 밖 낯선 곳에서 만난 그 친구에게서는 푸른 잡초로 뒤덮인 언덕을 자유로이 헤쳐나갈 수 있을 거 같은 단단함이 뿜어져 나왔고, 그 친구의 영향인지 내 안에도 작지만 뜨거운 자립심이 생겨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