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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을 왜 만나?

데이트 폭력

by mato

"야, 야. 일어나 봐." 발로 툭툭 치며 자고 있는 나를 깨운다.

눈을 겨우 뜨며 그를 올려다보면, 그는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씨발, 너 뭐냐? oo이랑 연락했더만? 잠이 오냐?"

내 핸드폰을 뒤져본 것이다.


나는 가끔 아팠던 지난 연애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나를 내리깔고 보며, 내 면전에 대고 담배를 연신 피우다가 가래와 욕을 연달아 뱉고는 담배꽁초를 힘주어 내팽개치는 사람과의 연애, 아니, 데이트 폭력을 말할 때면 어김없이 이날이 먼저 떠오른다.

"쌍욕을 내뱉으면서 자고 있는 나를 발로 쳐서 깨우는 폭력적인 사람을 만난 적도 있어."라고.

"그런 사람을 왜 만났어?"


그런 사람.

정말 제멋대로인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건,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데, 호감이 있어 일부러 부른 자리인 줄 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친해지고 웃고 떠드는 사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끌어안는 그의 행동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만나게 되었다. 고작 무안을 주는 게 어려워서. 나 때문에 분위기를 망칠 수 없어서. 거절하고 나면 그다음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그날 새벽에 발로 깨운 것까지만 얘기해도 충분히 폭력적이라, 잠자리를 하고 나서 잠들어 있던 내가 알몸 상태였다고까지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화가 나면 자기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의 모습에 나는 몸을 일으켜 이불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이만하면 내가 바람이라도 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에게 호감으로 다가온 다른 사람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연락을 시작했던 것이 맞다.

그럼에도 미안함은 없었고, 그의 모습이 상당히 놀랍지도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냥 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살을 맞대고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함부로 대하고 무례하게 군다는 것이 그날 밤, 그곳을 선택한 내가.. 아니 거절하지 못했음이 후회스럽고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어떠한 대화도 통하지 않고 변하지 않을 그 지랄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 지친 기분이었다.


그와는 진작에 끝이 났음에도 집착과 감금으로부터 드디어 벗어난 상태였다.

연락이 꽤 몇 개월 두절되고 비로소 내가 괜찮아질 때쯤 다가온 누군가와의 소식에 남 주기는 싫었던 그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탓인 지 다시 찾아와 미안했다고 잘해주겠다고 생떼를 부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인 걸 알고 만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절을 못 해 만나게 된 건 맞지만, 서로 개구진 장난을 주고받고 즐거웠던 연애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적당한 선에서 맞장구를 쳐줄 때도 있었고, 그의 친구가 말리기도 했지만, 그 장난은 선을 넘어 기분을 상하게 하기 딱 좋았고, 점점 심해지는 언행의 그는 특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나를 짓밟는 것을 즐겼다. 내 지인을 만날 때조차 나를 하대하며 놀렸고, 본인 지인들이 많은 곳에서 마치 '내가 어떻게 날뛰고 함부로 대해도 얘는 다 받아주는 애야.'라는 걸 모두가 알게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러면 몇몇은 분위기 파악 못하고 같이 웃기도 했다. 그 어처구니없음에도 나는 대놓고 무안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나가서 얘기하자." 어딘가로 나가는 중에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어쩔 거냐며 까불댔지만, 헤어지자는 내 진심에 늘 미안하다고 싹싹 빌며 말했다. 진짜 돌 아이한테 잘못 걸린 것이다.


지인이 없는 곳에서는 나도 그나마 화를 내곤 했는데, 음식점에 마주 앉아 말끝마다 나를 병신이라고 부르는 그에게 나는 기력 없이 하지마, 그만해란 말만 할 뿐이었다. 그는 마치 내가 화내기를 기다리듯 멈출 줄 모르고 웃으면서 계속 병신이라는 말을 반복했고, 참고 참던 나는 시킨 메뉴의 음식이 나옴과 동시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는 또 당황한 기색으로 떨리는 몸뚱이를 이끌고 나를 쫓아 나왔다.

"아, 알았어. 미안, 안할게." 나에게는 하루종일, 매일매일 하던 짓을 본인이 받는 것에는 극도로 예민했다. 나는 100번 1000번도 참았다가 낸 화이기에 그 식당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앞만보고 터벅터벅 빠르게 걸어갔다. 나를 돌려세워 큰소리로 화를 내고 욕설을 해대도 지긋지긋하게 내팽개치는 담배꽁초에도 무서울 게 없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기를 기도했다.

홧김이 아니라 진지하게 대화로 시도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의 집에 나를 방치해두었다.

내가 하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않고 담배를 하루종일 피우며 게임만 했다.

내가 집에 가겠다고 하면 조용히 하라면서 신경질을 냈고, 불안함과 흥분을 다리를 떨어 내비쳤다.

나는 그 모습이 무서웠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일어서 나가려고 하면 문을 막아 세웠고, 문밖으로 나가는 나를 몇번이고 힘으로 끌어당겨 집안으로 밀어넣었다.

맞지 않았고, 묶여 있지 않았을 뿐, 틀림없이 폭행이고 감금이었다.

어쩌다 가끔 분위기가 괜찮으면, 안심을 시키고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것 마저도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기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집에 들어갔을 때 만이라도 폰을 꺼두어야 했고, 그게 단 10분이어도 그는 불안해 빨리 오라는 연락을 남겼다.

나는 정말 이 관계를 끝내고 싶어 선물을 준비하고 편지를 썼다.

설득하는 좋은 말들로 가득 포장해 헤어지자는 내용이었다.

내가 내민 선물과 편지에 그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고, 편지를 펼쳐보지도 않고 내용을 예상한 듯 화가 치밀어 오르는 얼굴로 눈앞에서 찢어버렸다. 별의별 모습을 다 봐왔지만, 그런 건 또 처음이라 허무맹랑하니 공포스러웠다. 이 파국의 관계가 끝이 날까?


이후 본가로 간 그가 가족과 지내면서 불안을 회복한 건지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연락을 하지 않은 몇 개월이 주어졌고, 미안하다며 후회한다며 돌아온 그에게 지금처럼 만날 수 없다고 말했더니 이전과는 다르게 잘하겠다고 매달려서 그의 집에 다시 발을 들였던 날이 바로 그 날인 것 같다.

이제는 많이 지난 일이라 뒤죽박죽 섞여버렸지만, 그와의 남아있던 모든 기억 조각을 다 털어내 후련해 지고 싶었다. 소리치며 싸우다가 강가로 뛰어 내려갔던 일, 싸우다가 눈썹 칼에 손을 베인 일, 두통약이 들질 않아 처음 내 발로 신경과를 찾아가 약을 타먹은 일, 건물 테라스에 몇 시간 넋이 나간 채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대답하지 못했고 그누군가가 자리를 비웠을때 생각했다.

'뛰어 내릴까?'


다시 본가로 가있는 그로부터 헤어지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은 감기몸살로 아파 누워있던 상태였는데, 그토록 노력하고 어려웠던 헤어짐을 통보받았다는 게 왜인지 억울하고 서럽기도 했던 거 같다.

나는 왜 그토록 그런 사람을 곁에 두었을까? 나로 인해 달라지길 희망했을까?

그와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나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몇 번의 강압적인 톡과 전화가 왔지만, 더는 받아주지 않았다. 거절했고 상대하지 않았고, 결국 차단했다. 그의 닮은 뒷모습만 보고도 소름이 끼치고 공포스럽기도 했으며, 어느 때는 우울감에 고통스러워 마주치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최근, 지난 연애 상대를 주제로 한 얘기에 떠오르는 그날 밤의 한줄 문장을 습관처럼 얘기하면서 불쌍한 나를 되뇌는데, 외마디 말이 나를 멈춘다. "잊어."

아...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 않았다. "어... 응."

나를 함부로 대한 이야기를 들추며 궁금해하지 않았다. 힘들었던 과거에 생각이 잠기길 원하지 않아 했다.

나와 맛있는 것을 먹으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정말 웃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야, 야. 일어나 봐.'로 시작하는 문장이 스치자, 조금의 감정도 흔들림 없이 두어 시간 만에 써 내려간 글.

그러고 보니 어언 10년쯤 지났다. "잊어." 나는 그 짧고 단순한 말이 좋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토록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그를, 그로부터 괴롭힘당했던 나를, 이제는 잊기로 마음먹었다.

꿋꿋이 버텨낸 강한 나만을 남겨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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