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을 안겨주는 죽음, 열심히 무엇을 해야하는가?
세 자릿수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가 또 일어났다.
*이 글은 대참사, 사고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며, 죽음을 접한 개인의 이야기임을 미리 전달드립니다.
세월호 304명, 사고가 난 2014년 나는 병원 입원실에서 지냈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린 것은 아니고, 대형마트 마당에 뿌려놓은 특수효과 인공눈이 덮인, 부서진 농성천막으로 너부러진 물건들을 치우고 있는 중에, 뭔가 잘못 밟았는지 걷는 게 불편할 정도로 발에 통증이 있었다. 말 그대로 청소 중이었지 다칠만 한 게 없었기에, 업무 상사는 내가 일하기 싫어서 엄살을 부리는 것쯤으로 대했고, 나 또한 핑계 대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으로 눈치를 봤다.
뒤늦게 간 병원에서는 발 뼈에 금이 간 상태라며 수술을 권했지만, 20대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프로젝트를 끝내야 된다는 생각에 수술 일정을 미루고, 깁스를 한 채 택시를 타고 프로젝트 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란,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 영화 촬영 현장이었고, 목발을 짚고 이동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며 있는 눈치 없는 눈치를 봤다. 그 정도면 어느 누구 하나 그냥 집에 보낼 법도 한데, 왜 그런 사람이 없었나 싶고, 그런 사람이 없을 법도 한 게, 대중들이 접하는 영화 현장이란 카메라가 돌고 "레디, 액션!" 하면 배우가 연기를 멋있게 하는 모습만 드러나기에 당연히 모를 일이지만, 그 뒤에는 힘없는 가건물을 짓거나 폭파하는 효과를 쓰거나 등 생각보다 사상...아니, 부상자가 다수 나오는 곳이다 보니, '다쳤구나.' 정도로 그냥저냥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티 테이블에서 간식들 만큼이나 동이 나는 게 약이기도 했다. 이 말인즉슨 감기로 앓든 배탈이 나든 대수롭지 않게 사탕 먹듯 약을 먹어가며 일하는 사람이 이미 몇십 명이 되는 곳인지라, 병가를 내는 게 업무에 지장을 주는 별난 일이 되기에 아픈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곳, 당시에는 이것이 열악한 이곳의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여러 곳에 많이 차지하는 사회의 모습 아닐까 싶다. 회사라는 곳을 다녀본 적이 없어 정확한 분위기는 모르고 나 또한 매체로 보이는 모습, 억수의 비가 쏟아져 강이 범람하고, 태풍이 불어 간판이 떨어져 나가도, 폭설로 인한 사고들이 연이어도, 심지어 나라에 계엄령이 터져 밤잠 설쳤대도 여기저기 sns에서는 출근을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쏟아낸 글을 쉽사리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번거로움을 안고 눈치를 보며 프로젝트를 마쳤고, 발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당분간이 될지 한동안이 될지 모를 기간에 일도 물론이고, 걷지도 뛰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워 발목 보호대를 찬 상태로 막 재미 들인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넓은 대학교 캠퍼스 데이트를 누렸다.
하고 싶은 것을 무리해가면서까지 하고야 마는 나도 참 어지간하다.
우리는 저렴한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식당 내에 벽걸이 TV로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다.
너무 놀라 발길을 멈춰있던 것도 잠시, 전부 구했다는 뉴스를 확인하고서는 멀뚱히 길 막 할 수 없어 붐비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인명피해는 없어서 다행이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내 수술은 발목 안쪽 힘줄을 잘라내고 깨지고 튀어나온 뼈를 깎아낸 뒤 다시 힘줄을 잇는 수술이었다.
어릴 때 다친 뼈를 방치해뒀다가 무리를 하면서 이제서야 발견된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양발 다 그런 상태인데 한 번에 할 건지 아픈 발만 할 건지 택할 수 있었고, 무서운 나는 한쪽 발 수술만 진행했다.
눈을 떠보니 입원실이었고, 가끔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 같이 살던 친구, 연애로 만나고 있던 친구가 번갈아 입원실에 다녀갔다.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도 사 오고, 시험기간 간이침대에서 밤잠 설치며 공부하던 모습도 너무나 감사하다. 나는 당시 불이 붙은 발로 축구를 하는 꿈을 꾸다가 깨고, 깨면 아파서 다시 잠드는 걸 반복할 정도로 수술하기 전 통증보다 몇 배는 아팠고, 병동 뉴스는 전부 구한 줄 알았던 세월호에서 사망자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멀쩡한 삶을 살던 내가 휠체어로 이동을 해야 했기에 다시는 걸을 수 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우울증이 왔고 세월호 뉴스가 나를 더 암담한 망상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눈치 보는 게 습관인 나는 친구보다 애인의 집을 선택했고, 퇴원을 하고서도 부탁을 하는 게 어렵고, 케어를 받는 게 스스로가 민폐인 거 같아 혼자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거 같다. 샤워 하나만 하는데도 하루를 보낼 정도로 지치고 뭔가 잘 안되면 짜증 나고 괴로워했다. 그러다 보니 세월호는 온데간데없고 지극히 내 개인 사정으로 한 해가 너무 우울했고 간신히 걷기 시작할 때부터 옆에 있어준 그 친구와 동대문에서 무지 티셔츠를 떼다가 수작업 그림을 그려 골목길에서 판매하기도 하고, 팔찌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어떻게든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며, 발의 상태에 대해 뛰지는 못한다고 미리 얘기를 했다. 뛰지 못하는데도 영화 현장에서 나를 뽑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열악하고 구인이 어려운 상태였겠는가? 나는 그런 걸 알아채거나 따질 여유가 없었고, 단편 전쟁 영화 현장에서 잘 다져진 땅도 아닌 험한 산길, 논밭 길을 걷고, 안 되면 살살 뛰면서 보출 배우들에게 소품 총기 등을 나눠주곤 했다.
그런 식의 재시작으로 간절하고도 험하게 영화 일에 뛰어들어 못 볼 꼴 많이 당하며 견뎌 일을 해왔다.
그렇게 내 일만 하다가 연애도 끝나버리고 많은 것을 겪은 뒤 2022년, 8년 만에 세월호 다큐멘터리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바쁘게 흘러가면서 '세월호 진상 규명, 진상 규명!'을 못 보고 못 들은 게 아니다.
아마도 나만큼이나 오다가다 뉴스든 뭐든 끝없는 세월호 관련 집회들을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깊게 들여다볼 여유는 없는 것이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우울하게 침체되어 있을 수 없으니까. 나는 많은 것들을 잃고 내려놓고서야 우연히 참여하게 된 예술로 프로젝트가 안산에서 진행하게 되면서 세월호 일가족이 많은 안산 안에서의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인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단원고 친구들이 많았던 학교부근 동네는 전체가 장례식 분위기로 우울했다고 한다. 반면 다른 동네 사람들은 사고일뿐이라며, 지원금을 받는 것 등 그만했으면 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내 삶만 살다가 8년이 지나고서야 김어준 언론인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로 사건을 깊게 들여다보며 '이랬구나. '뒤늦게 소름 끼쳐 했다는 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고, 세월호 사고 때 만들어진 세월호 탑승자분들의 트라우마 심리 안정 휴식공간 '쉼표'에 가서 몇 개월간 내가 할 수 있는 간단한 프로젝트를 참여했고, 프로젝트 마무리쯤, 10월에는 운 좋게 몇 명의 단원고 친구들과 만나 대부도 펜션에서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날은 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날인 데다가,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 내심 아이들이 걱정되었지만, 내가 외면하고 바쁘게 보낸 세월 동안, 이 친구들은 얼마나 많은 바다와 마주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스스로 숙연해졌고, 혹여나 내 표정에서 안타까움이 보일까 봐 조심스러웠다.
이런 프로젝트를 참여하면 간혹 예술 활동으로 봉사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당연히 정말 몰라서 쉽게 물어보는 사람들을 접하곤 하는데, 봉사라는 단어는 맞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 나와 함께 한 작가님들도 서로가 필요하기에 만나는 협업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남아 있을 트라우마를 짐작할 수 없어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암묵적으로 모두가 태연하게 같이 보드게임도 하고 바베큐도 구워 먹으며, 농담도 주고받는 분위기의 시간을 보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결혼을 앞두고 있기도 했고, 나보다도 밝고 유쾌한 성격의 모습에 얼마나 안심되었는지 모른다 '그래, 시간이 꽤 흘렀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159명.
나는 다시 캄캄해진 내 방 안에서 최대한 뉴스를 접하지 않고, 내 할 일을 하며 아무렇지 않으려 애썼지만,
내가, 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작고 약한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에 잠기며, 무서워 공포에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