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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추석 후유증

가족이라는 단위

by mato

일요일이면 이불이 깔린 거실에 여기저기 뒤엉켜 누워 TV 리모컨으로 아침을 맞이하던 가정에서 자랐다.

'배고파, 배고파'를 돌아가면서 내뱉으면, 못 이겨 일어나는 엄마가 부엌으로 향하며

"일요일 아침인데 나도 좀 쉬자!"라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같은 학교에 두 학년 터울로 다닌 삼 남매의 소풍날이면, 꼭두새벽 부엌 식탁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김밥산을 쌓고 있던 엄마, 몇 년 동안 학생 어머니 회장을 도맡아, 항상 선생님들 도시락까지도 챙겨주셨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라는 직업은 퇴근도 휴일도 없다는 것을.


제사 때만 되면 분주한 부엌도 모자라 거실 소파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콘센트마다 고모들이 나눠 앉아 넓은 철판에 각종 전을 굽는 모습과, 뜨거우니까 조심하라던 잔소리를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제사도 많은데 명절까지, 1년 내내 몇 날 며칠을 먹는 각종 나물과 전들, 결국 먹다 썩혀버리는 과일들.

고기며, 튀김이며 애매하게 남은 제사음식들은, 버리지 않고 국밥으로 재탄생되었다.

엄마가 해준 음식 중에 가장 싫어한 음식이었는데, 두 시간 거리 기숙사가 딸린 타 지역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시는 먹을 일이 없었다.


그쯤을 기준으로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돈 없어!"라고 말할 때, 언니처럼 집안일로 딜을 보거나, 동생처럼 재롱으로 받을 수 있는 요령이 내게는 없었다. "없으면 말아! 안 쓰면 되지!"라는 사고의 깡다구,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꼬리를 내리지 않을 오기로 토라지고, 융통성 제로에 고집스럽게 자존심을 지키던 나는 여전히 사회성 좋은 편에는 들지 못한다.

그런 내가 고등학생 수학여행을 앞두고, 집안에 금이 간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주변에 들켜서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상상하면 쪽팔려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보통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폭보다, 플러스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폭이 더 커서 앞으로의 감당에 대한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 가훈은 '가화만사성'이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것이 잘된다는 뜻이다.

일이 꼬이고 막힐 때마다 가훈의 뜻이 스며 나와 되새겨지곤 했다.


어느 때보다 침착했고, 그야말로 포커페이스 고수였다.

친구들과 평소대로 지냈고, 집안 걱정보다 곧 다가오는 수학여행 때 입을 새 옷과 용돈 마련이 큰 고민이었다. 수학여행에 대한 얘기, 정확하게 수학여행에 입을 옷을 사고 싶다는 얘기를 당연히 집에 꺼낼 수도 없었고, 교차로에 배치된 벼룩시장 종이신문을 챙겨 와 아르바이트를 알아보았다.

엄마한테 전화해 추석 때 집에 가지 않는 것을 허락받고, 곧바로 낯선 번호로 부모님 동의와 나이, 키만 얘기한 후, 알려준 시간과 장소로 찾아가 겁도 없이 봉고차에 올라탔다.

내가 구한 아르바이트는 휴게소 추석 단기 아르바이트였다.

야외 매대에 서서 고향길, 여행길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뜨거운 포장 어묵과 김밥, 고구마스틱, 소시지를 팔았다. 사촌오빠의 미움을 사는대다가, 차멀미도 심해 친척집에 가는 길이 즐겁지 않았던 내가, 휴게소 매대에 서보니 투덜대는 모습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 와중에 어찌 된 일인지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엄마였다.

머쓱하게 고구마스틱을 가리키며, 먹을 거냐고 묻자, 쓴웃음으로 고개를 젓던 모습, 나는 마치 스치는 손님을 대하듯 감정 없는 표정으로 몇 마디 없이 돌려보냈다.

엄마는 왜, 어떻게 그곳까지 나를 찾아왔을까. 나는 왜 그때 엄마를 보고 웃지 않았을까.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게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등학생인 나를 추석기간 종일, 휴게소 야외 매대 앞에 서있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원망만이 앞서있었다.




암담한 분위기의 집은 남아있는 남매에게 떠맡기고, 아르바이트로 혼자 이기적인 선택을 했던 그때가, 타지 생활을 하면서 명절 연휴에 가족을 보러 가지 않는 죄책감을, 합리화시키는 시초였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 전화 한 통을 위안으로, 내 일정을 빠듯하게 채우고 당당히 업무를 택하기까지 쉽지 않은 경우의 수를 겪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갈 때마다 달라져있는 상황과, 웃지 않고 말문을 잘 트지 않는 내 썩은 표정에 눈치 보는 엄마와 아빠 각각의 얼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속없는 말들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노력하는 언니와 동생을 보는 것도 아니꼬웠다. 삼촌의 같은 안부 말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둥글게 깎이지 않는 나의 뾰족한 모들이, 상대들을 찌르는 것 같아 명절이 다가오는 한두 달 전부터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 중 어떤 것을 택해도 대부분 명절이 끝나면 불행 후유증에 시달렸다. 재작년부터 코로나를 핑계로, 그 전에는 일과 차편 매진을 핑계로 명절의 불편함을 피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지, 이번에는 차편도 알아보지 않고 재택근무와 넷플릭스 일정을 계획으로, 각각의 전화 통화와 함께 시작한 추석 연휴, 괜히 어릴 때 사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릴 때의 뒤엉킨 가족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허전한 옆구리로, 가을바람이 시리게 치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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