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작은 시골 동네, 한 학년에 반이 하나만 있는, 학생수가 많은 학년은 두 반이 최대인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면서 왕따가 되었다.
물론 왕따를 당하지 않는 주도자 무리도 있었다. 일진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을 때였다.
대장이라고 했던가
대장이 과녁판 10번이라고 했을 때 대장 대체자, 부대장이 9번, 대장이 좋아해서 꼭 데리고 다니는 친구가 8번, 그리고 7번쯤에는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9,10번 친구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 애쓰는 친구가 행동대장처럼 있었다.
나 또한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고, 내 팔짱을 끼며 놀자고 하면 거절하지 못했고, 우리는 이런 사이를 친구라 불렀다. 언제든 왕따가 될 수 있고, 왕따와도 친구로 지낼 수 있는 4번쯤 위치에 나와 같이 순한 얼굴을 가진 애들이 말없이 무리의 인원수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어른들 눈을 속이는데 적절했다.
따돌림의 시작과 끝은 당하는 입장에서 정하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분위기가 달라짐을 느낀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 무리 안에서 떠나지도 섞이지도 못한다. 무리 밖에서는 친구들로 보이는, 왕따로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은근한 따돌림. 은따 유형이 많았다.
우리는 어렸다. 10살~ 12살쯤이었을까? 유년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다.
작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학교여서, 평소 함께 어울리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의도가 있는 것인데, 느낌적인 느낌이라 설명할 방도가 없다.
나는 그때도 밖으로 내색하지 못했다. 조용한 편이기도 했지만, 자존심도 셌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방 침대에 엎드려 코를 박고는, 생일파티가 있다는 것 자체를 까먹으려 애썼다.
하필, 어른들끼리 친해서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아이들을 태운 친구 아빠 차가, 우리 집 앞에서 대기하는 덕에, 등 떠밀려 선물도 없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그 차에 탑승했다는 게 문제지만.
아마도 어른들은, 고작 10살 초반 애들이니, 놀다 보면 분위기가 금방 괜찮아질 거로 생각해서, 나를 떠밀어 생일파티 모임에 던졌겠지.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가 이때인 것 같다.
같은 공간, 다른 공기. 기억의 잔상을 그리자면, 뭔가를 가지고 놀다가 내가 관심을 가지면 재미없다고 말하고, 밖에서 놀겠다며 마당으로 나가버린 친구들, 그들을 뒤따라 나서겠다고 흐트러진 신발 속에서 내 신발을 급하게 찾던 기억, 무슨 놀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옥상에서 나를 내려다본 기억.
“우린 들어갈 건데?” 이러한 선 긋는 말투에서 ‘우리’에 속하지 못한 기억.
내가 받은 느낌으로는 어떤 놀이에도 미워함이 묻어있었다.
더 애쓰고 싶지 않았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우리'를 만들어 들어가는 친구들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혼자 방황하며, 흘러가는 시냇물을 멍하게 바라보며 걷고, 의미 없는 꽃잎 띄우기를 하며 청승스러운 사색에 빠져있었다. 초대받은 친구들 중 유일하게 남자였던 두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한 명의 유별난 개구쟁이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너 왕따야?”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촌스럽도록 순박한 내가 듣기에는 너무 생소한 직설화법이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기려 했지만, 직설화법 친구는 얄밉게도 내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나만 아는 줄 알았던 느낌이 남의 눈으로 확인된다는 게 창피하고 서글펐다.
그때도 지금도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단단하지 못할까?
두 친구를 방패 삼아 조심스럽게 친구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는, 한층 더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생일 파티는 대략 마무리된 듯했고, 차가 없이는 꽤 먼 거리의 외딴집 같은 위치인데, 친구 아빠가 안 계셔서 다 같이 걸어가야 했다. 논과 밭, 냇가의 시골길을 걷는데 왜인지 친구들과 나와의 폭이 멀어졌다.
바보 같은 나는 집에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만 되뇌고, 되뇌며 땅만 보고 걸었고, 무리 중 다른 한 친구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물 좀 마시자며, 무리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나는 마당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대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였다.
평소 대장의 비위를 맞추는데 애를 쓰던, 행동대장 7번 친구가 다가와 말했다.
“먼저 가려면 가.” 그 말에 돌아서 혼자의 길로 발을 뗐고, 1초도 안되게 눈물이 꽉 차올랐다.
내 뒷모습을 볼 친구 무리들에게 너무나도 나약한 나임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산산조각 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나 보다.
꿋꿋하게 걸어가려 했지만, 충격을 잘 흡수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큰 다리를 건너자 도로가 나왔다. 큰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소음에 참고 있던 울음소리를 내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죽어버릴까.. 차에 뛰어들까? 죽으면 덜 고통스러울까?’ 겨우 10대 초반이었다.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서 나처럼 은따가 되는 것도 있지만, 은따보다 무서운 것은 대놓고 괴롭히는 전따. 전교생의 따돌림을 받는 유형이 있었다. 전교생이 같은 마음으로 미워할 순 없어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괴롭히고 누구도 말리지 않고 방관하는 것.
6학년 언니가 우리 학년에 전학 온 친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운동장에 내팽개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유는 싫어하는 친구의 동생인데 대들어서? 글쎄, 사실 어떤 이유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런 괴롭힘을 할 수 있단 말이지? 운동장 흙바닥에 주저앉아, 학교가 떠나가라 소리 내어 우는 그 친구를 전교생이 둘러서 보고 있던 광경이 굉장히 불편했다. 그럼에도 말리기는커녕, 놀란 티 조차 내지 못했다.
그 친구가 교실로 들어서면 왜인지 반 내에서도 괴롭힘을 당했다. 괴롭혀도 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서 일까? 그럴 때 면 그 친구는 항상 큰소리로 맞서거나 서럽게 울었다.
나는 저렇게 소리 내어 울 용기도 없는데...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나는 다른 친구들 모르게, 그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고, 간식을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며 놀았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나와는 달리, 그년이 미친년이라며 싫은 건 싫다고 표현을 뚜렷하게 하는 친구라 신기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우는 소리만큼 웃음소리도 큰, 밝고 웃긴 친구였다. 나중에 다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고, 그 성격이라면 아마도 나보다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도로로 뛰어들까 생각이 들었던 심적 따돌림.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교문에서 운동장에 들어선 어느 아침. 쓰레기를 대신해 낙엽을 줍고 있었다.
한 학년 언니가 다가와 말했다. “너 왕따야?”
어떻게 알았지? 전날 부로 나는 또다시 왕따가 되었다.
마치 한기가 느껴져 가을이 온 걸 알아챈 것처럼 무심하게 말이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왕따 이틀째 되던 그날 아침, 그 얘기가 어떻게 벌써 윗 학년에게 들어갔지?
담담한 생각을 하면서도 누군가 들었을까 봐 의기소침한 마음과 어김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주눅 든 상태로 교실을 들어가자, 아침에 운동장에 있던 친구가 다가와 뭔가에 쫒기 듯, 설득하며 말했다. “오늘부터 너 왕따 아니야. 너 대신 쟤가 왕따야. 알겠지?”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무래도 윗학년들에게 얘기가 들어가다간, 나의 친언니 무리가 교실로 오는게 두려웠나보다. 당시 왜 언니찬스를 쓰지 못했나 하는게 좀 아쉽다.
나는 알았다는 듯 끄덕이며, 그 친구가 가리킨 ‘쟤’가 누군지 조심스레 확인했다.
순간 눈이 마주친 ‘쟤’는 평소 내가 가장 동경하던 친구였다.
왕따를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친구인데, 괜히 나 때문에 라는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들어 그 친구를 쳐다볼 수 없었다.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지고 초라했다.
주도자 무리와 섞여 복도를 걷는 나는 혼자인 느낌이었지만, 교실에 남겨진 왕따로 지목당한 친구는 오히려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스쳐 지나는 순간 그 친구에게 알 수 없는 위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느낀 이 감정은 뭘까?
내게는 그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나와는 달리 이기는 수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작은 동네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돌아가면서 왕따를 겪고 봐 왔다.
학교에서는 같이 왕따를 시키는 것처럼 무리에 껴있다가도, 몰래 울고 있는 왕따 친구를 달래어 주기도 하고, 왕따인 친구와 마당의 신발을 숨겨놓고 숨죽여 놀았던 기억도 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왕따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따돌림은 작은 마을을 벗어나서도, 어리지 않아도, 집단이 생기면 또다시 만들어지곤 했다.
어디까지나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더 부끄러운 일인걸 알아야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친구에게 뿜어져 나왔던 빛처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힘인것 같다.